암빙벽등반

노적봉 써제이길 - 2021년 5월 2일(일)

빌레이 2021. 5. 2. 19:34

서울에는 어제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아침부터 맑은 하늘에 밝은 햇살이 비춰주니 산에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창한 아침이다. 대관령에는 34년 만에 '5월 눈'이 내렸고, 설악산에는 20cm의 눈이 쌓였다고 한다. 도선사에서 용암문을 거쳐 노적봉의 써제이길 출발점까지 가는 등로 주변이 온통 신록의 향연 속이다. 새벽까지 내리던 생명수 같은 봄비에 깨끗이 몸을 씻은 나무들은 하나 같이 찬란한 연둣빛 이파리들로 단장하고 성장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오월이 열리자 마자 갑자기 울창해진 듯한 숲은 그 속을 걷고 있는 산객들까지 푸르게 물들일 기세로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하드프리 암장과 인공암벽을 돌아다니면서 운동했던 것이 암벽등반 시즌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면, 이제는 나도 활동을 시작한 초록빛 나무들처럼 서서히 대자연 속에서 높은 암벽을 오르는 멀티피치 등반의 기지개를 펴야할 때가 도래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말엔 거의 모든 루트에 클라이머들이 개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수봉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한산하면서도 자연스런 등반선이 좋은 노적봉에서 올해의 첫 멀티피치 등반을 시작하기로 한다. 나처럼 척추관협착증을 앓고 있어서 허리 통증에 신경써야 하는 사람들에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장시간의 어프로치를 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다고 한다. 이럴 땐 등반 계획을 세밀히 잘 세워서 가능하면 악우들과 중복된 장비를 피하고, 내 짐은 단 1그램이라도 가볍게 챙겨야 한다. 클라이밍보다는 대자연 속의 산에서 머무는 것 자체를 더 좋아하는 내가 배낭의 무게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 한편으론 서글펐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육체적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서 앞으로도 가능하면 오랜 세월 동안 산에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이 세 번째인 써제이길은 크랙을 따라서 이어지는 자연스런 등반선에 중간 볼트가 거의 없어서 캠이나 슬링으로 확보점을 만들면서 등반해야 한다. 난이도는 쉬운 편이지만 이른바 트래드 클라이밍을 연습하기에 적당한 바윗길이다. 그래도 올해의 첫 멀티피치 등반인 만큼 출발할 때의 긴장감은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디딜 때의 긴장감이 어느새 사라지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노적봉 정상에 도착했을 땐 약간 싱겁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드프리 암장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쓰던 것에 비하면 그다지 힘겨운 구간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간간히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 속에서 매우 신중하게 홀드를 찾아야 한다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청명한 하늘 아래서 올해의 첫 멀티피치 등반을 안전하게 열었다는 만족감이 남는 등반이었다. 대동문을 거쳐서 구천계곡을 따라 덕성여대 앞까지 제법 긴 하산길을 택한 바람에 허리통증이 시작되었으나 견디기 힘든 상태는 아니었다. 오늘 같이 어프로치가 긴 등반에서는 아픈 허리를 감안해서 좀 더 세심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 새벽까지 내린 비가 그쳐서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써제이길 5피치를 등반하는 중이다.
▲ 도선사에서 용암문에 이르는 등로 주변이 신록으로 물들어 있으니 어프로치가 전혀 힘들지 않았다.
▲ 만경대 우회로를 따라 용암문에서 노적봉으로 가는 중이다.
▲ 등반거리가 60미터에 가까운 써제이길 첫 피치를 출발하고 있다. 중간볼트는 하나 뿐이어서 캠과 슬링으로 확보점을 구축했다. 바람이 차가워서 자켓을 입어야 했다.
▲ 써제이길 둘째 피치 초반부는 살짝 까다로운 오버행으로 시작한다. 
▲ 둘째 피치에도 중간볼트가 없으니 크랙에 캠을 설치하여 적절한 확보점을 구축해야 한다. 
▲ 둘째 피치 확보점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사진 좌측의 크랙을 따라서 올라왔다.
▲ 셋째 피치도 초반부는 약간의 오버행으로 시작한다. 홀드는 양호한 편이다.
▲ 셋째 피치는 돌출된 암각에 슬링으로 확보점을 만든 이후 구간에서 좌향 크랙을 올라서는 곳이 약간 까다롭다.
▲ 넷째 피치도 중간볼트는 없고 캠을 사용해서 확보점을 만들어야 한다.
▲ 다섯째 피치를 등반 중이다. 보통은 이곳을 오르기 전의 널찍한 테라스에서 쉴 수 있는데 바람이 세차서 그냥 통과했다. 다섯째 피치도 중간볼트는 없고 캠으로 확보점을 구축해야 한다. 
▲ 마지막 6피치를 출발하기 직전이다. 
▲ 6피치는 출발점에서 보이는 곳에 중간볼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비교적 쉬운 슬랩이지만 안전을 위해서 확보점 밑의 턱을 올라서기 전 암각에 슬링으로 중간 확보점을 구축하고 올랐다.
▲ 녹음이 짙어져 가는 북한산의 숲을 배경 삼아 마지막 확보점에 도착한 순간의 환희를 만끽해 본다.
▲ 마지막 확보점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노적봉 정상이 나온다. 
▲ 노적봉 서봉 정상에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남겨본다.
▲ 언제봐도 아름다운 삼각산의 자태가 청명한 하늘 아래에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의 신록은 꽃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