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인수봉이다. 날마다 등반한다고 해도 질리지 않는 곳이다. 수많은 바윗길들이 저마다의 매력으로 클라이머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기범씨 같은 전문 클라이머들 중에는 인수봉 아래에 움막이라도 짓고 살면서 매일 등반에만 몰두할 수 있는 더트백(dirtbag)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엄연한 직장과 가정이 있는 평범한 아마추어 클라이머들도 마음 한구석엔 모든 사회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등반에만 전념하면서 살고 싶은 욕구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매년 인수봉의 모든 루트를 완등한다는 기범씨로부터 그 프로젝트의 적절한 명칭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수봉 오딧세이'였다. 긴 세월 동안 인수봉 바윗길의 "찐"으로 살아온 기범씨의 인생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수봉 남면으로 향하는 어프로치 도중에 잠시 쉬면서 기범씨, 정길씨, 동혁씨, 은경, 나, 이렇게 5명의 악우들이 인수봉 전 루트 완등 프로젝트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 관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는 '인수봉 오딧세이'보다는 프로젝트 자체를 표현하는 명칭이 적절할 것 같았다. 일단은 가칭 '캐리(CARI, Climbing of All Routes in Insu peak)'로 부르자는 나의 제안에 일행 모두가 동의해 주었다. 이름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기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우리들끼리 은어처럼 간단히 부를 수 있는 명칭이 있다는 건 유쾌한 일이다. 올해의 '캐리'를 멋지게 완수해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오르는 인수봉 남면 아래의 가파른 접근로가 평소보다는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엔 나무 그늘 아래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남면의 '우리들의 만남', '하늘', '꾸러기들의 합창'에서 한 피치짜리 등반으로 몸을 풀었다. 나는 피로가 덜 풀린 몸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처음 올라 본 '우리들의 만남'만 등반했다.
오늘의 '캐리(CARI)'는 '벗'길로 정해졌다. 인수봉 동면에 있어서 오전엔 햇살이 따가울 것을 예상하여 일부러 오후 시간에 붙기로 기범씨가 결정한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송강호의 대사를 패러디 하여 "기범씨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고 내가 살짝 놀려주었다. <인수 선인의 바윗길>이란 책에서 별점 4개를 받을 정도로 인기 있는 루트인 '벗'길은 그간 연습 삼아서 2피치까지만 올랐었다. 이번엔 '벗'길 5피치 전체 루트를 우리 5명 모두가 끝까지 등반했다. 상대적으로 완만한 슬랩인 마지막 5피치를 제외하고는 모든 피치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그만큼 등반성은 높아서 만족감이 배가 되었다. 별점 4개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흥미진진한 루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벗'길 우측에 있는 별점 5개의 '귀바위D(취나드A)'와 별점 4개의 '심우'길도 악우들과 함께 오른 '캐리'에 포함되는 셈이다. 인수봉 동면 우측의 인기 코스들을 모두 경험해 봤다는 생각을 하니 그 뿌듯함은 더욱 부풀어 오르고, 앞으로의 '캐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오십대의 악우들 5명 사이에 '아재개그'로 불리는 말장난이 무성했던 하루였다. '우리들의 만남'을 등반하고 난 후에는 사연이 없어서 예능 프로그램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가수 노사연의 노래 <만남>의 가사를 이어서 "우연이 아니야"가 자연스레 따라 붙었다. 다른 소소한 말장난들이 있었지만, '벗'길을 마무리 하고 모두가 하강을 마쳤을 때, 정길씨가 했던 "벗길 잘 했어"가 최고작이었다. 동혁씨가 후등으로 갈때 위에서 확보 중이던 정길씨가 줄을 조금 느슨하게 당길 때 했던 "정길아, 땡기라"도 라임을 잘 맞춘 우수작 중 하나였다. 컨버터블 팬츠를 처음 착용해본 내게도 "벗길 잘 했어"는 통하는 말이 되었다. 워킹 중에는 반바지로 변신할 수 있는 컨버터블 팬츠가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철엔 여간 유용한 게 아니었다. 5십대 5명의 악우들 모두가 5피치짜리 '벗'길 잘 했다.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알찬 등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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