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광양 백운산-매봉-쫓비산-매화마을 종주 (2019년 3월 9일)

빌레이 2019. 3. 10. 11:56

수요일까지 극심했던 서울의 미세먼지는 목요일부터 걷히기 시작했다. 탁한 공기 속에서 기다리던 새봄을 맞이해야 한다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막연히 주말엔 봄꽃 구경이라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가끔 이용하는 버스산악회의 무박산행 일정이 눈에 들어온다. 광양의 백운산 등산과 섬진강변에 만개한 매화꽃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일정이다. 지리산 노고단과 섬진강이 가까운 호남의 명산 백운산은  예전부터 오르고 싶었던 곳이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기회가 잘 닿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봄소식을 가장 일찍 전해주는 곳으로 이름 높은 섬진강변의 매화 또한 직접 구경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해마다 매화축제장을 가득 메울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백운산과 매화축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볼 기회가 온 것이다.       


금요일 밤 11시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토요일 새벽 4시에 목적지인 진틀마을의 백운산 등산로 초입에 일행들을 내려준다. 주위는 새까만 어둠 속에 잠겨있고, 가로등 불빛만이 땅에 내려앉은 별처럼 흩어져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 밤하늘엔 무수히 많은 진짜 별들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영롱한 별빛이다. 헤드렌턴을 장착하고 백운산 정상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산속으로 들어서니 어둠은 짙어져 주변이 더욱 시꺼멓다. 다만 산길 옆으로 흐르는 힘찬 계곡물 소리에 저절로 생기가 돋는 듯하다. 발 아래를 비추는 렌턴 불빛에 의지하여 울퉁불퉁한 등로를 조심스레 밟아간다. 야간 산행 또한 오랜만이다. 진틀삼거리에 있는 숯가마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나목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별들이 유난히 똘똘해 보인다. 북두칠성을 이루는 일곱 개의 별들도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자연스레 여섯째와 일곱째 별을 잇는 가상의 선분을 확장하여 북극성을 찾아보는 것으로 북쪽 방향을 가늠해보게 된다.


진틀삼거리에서 좌측의 신선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여기부터 마루금에 올라서기까지는 무척 힘겨운 된비알이다. 여러 차례 숨을 고르며 백운산 주릉에 올라서니 신선대와 정상을 가는 방향이 갈린다. 잠시 망설인 후 어둠 속의 신선대는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매화마을까지 길게 걸어야 하는 까닭에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끼기로 작정한다. 보온 의류를 챙겨입고 마루금을 따라서 정상인 백운산 상봉에 올라선다. 아직은 일출 전의 희미한 여명으로 렌턴 없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뿐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정상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매봉 방향으로 잠시 더 진행하다가 바람을 등진 정상 코앞의 일출 조망터에 자리를 잡는다.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보온병에 준비해온 온수로 컵라면을 먹는다. 가히 꿀맛이다. 컵라면으로 몸을 데운 후 머지 않아 일출이 시작된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명한 일출이다. 처음으로 오른 백운산 정상에서 만나는 해돋이인 만큼 그 감흥 또한 새롭다. 일출을 대하면 자연스레 소원을 빌게 된다. 새벽 안개 속에 잠겨있는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태양의 출현은 언제나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섬진강의 물줄기가 아득히 보이고 겹겹의 산줄기들이 새벽 안개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니 금세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백운산 상봉에서 매봉을 거쳐 쫓비산에 이르는 구간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속한다. 유순한 흙길이 계속 이어지는 호남정맥길은 평소 자주 찾던 한강기맥이나 천마지맥의 산길을 많이 닮아 있다. 매봉에서부터는 햇살에 빛나는 섬진강을 왼편에 두고 진행하게 된다. 김용택 시인이 쓴 수필집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가 저절로 떠오른다. 갈미봉과 쫓비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물줄기는 지친 나그네의 심신을 달래주기에 부족함 없는 풍광을 선사한다.     


새벽 4시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장장 20 킬로미터에 이르는 산길을 걸었다. 발바닥이 뜨겁고 장딴지와 허벅지가 뻐근했던 산행은 섬진강변에 활짝 핀 청매실농원의 화려한 매화축제를 즐기는 것으로 그 대미를 장식한다. 산비탈을 하얗게 수놓고 있는 매실 과수원들과 그 앞을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두 눈이 즐겁다. 가히 절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해발 1200 미터가 넘는 백운산을 넘어서 기나긴 산길을 걸어온 후에 맞이한 봄꽃의 향연이라서 더욱 소중하고 값진 풍광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의 영롱함과 백운산 일출의 장엄함을 느꼈다. 봄빛으로 물든 섬진강과 강변을 화려하게 수놓은 매화의 향연을 보았다. 남도의 부드럽고 정겨운 산길인 호남정맥의 끝자락을 두 발로 밟은 뿌듯함이 남았다. 미세먼지로 갑갑했던 가슴이 뻥 뚤리는 듯한 통쾌함이 있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