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사려니숲길-거문오름-용눈이오름 (2019년 1월 25일)

빌레이 2019. 1. 27. 19:56

바쁠 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게 일이다. 겨울방학 기간인데도 요즘 나의 일상은 숨쉴 틈이 별로 없다. 주중에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 예전 같으면 학회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가볍게 소통하는 장으로 한숨 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요즘엔 교수들도 각자의 스케쥴이 워낙 빡빡하다. 그래서 공동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회의를 학회 기간에 할 수 밖에 없다. 학회가 학문적 교류를 위한 순수한 자리라기 보다는 연구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비즈니스의 장으로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학회 기간 중에도 한밤중까지 새로운 연구사업 수주를 위한 세미나를 같이했던 동료 교수들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짬을 내기 힘든 일정이었다. 하지만 일요일에 합류해서 내가 할 일을 맡기로 양해를 구했다. 몇 개월 전부터 이미 약속된 행사라는 핑계를 대고 제주 모임 참석을 위해 금요일 새벽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영어에 이스케이프(escape)라는 단어가 있다. 일상탈출이란 의미의 여행으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도망이든 탈출이든 나는 이스케이프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일상을 피해서 단 이틀 동안만이라도 심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으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오십이 넘어가면서 인생을 반추해보는 시간이 늘어난다. 눈앞의 일에 얽메이다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우를 자주 범하게 된다. 지금 열심히 사는 것도 결국은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무작정 일이 파묻혀 살았던 순간들은 잘 기억나지 않고, 바쁜 중에도 일상탈출을 감행했던 추억들은 오래도록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다. 일상탈출은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는 순간에 비유할 수 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은 골을 넣지 않고 패스만 하다 끝나는 게임에 불과하다. 제주행 비행기 속에서 이러한 잡생각을 하다보니 금세 착륙시간이다.


제주공항에서 안사장님과 혜원씨가 반겨준다. 곧이어 뷰티박이 도착하고 렌트카 사무소에서 염사장님이 합류하신다. 11인승 승합차에 다섯 명이 탑승한 후, 이미 하루 전에 도착하셨던 이사장님과 사모님을 호텔에서 픽업한다. 이상무님이 저녁 때 합류하면 이번 제주 트레킹 멤버 8명은 완성된다. 항상 만나면 즐거울 수 밖에 없는 모임이기에 승합차 속에서부터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거문오름 탐방 예약시간인 12시 30분을 염두에 두고 우선 사려니숲길로 이동하여 한 시간 정도를 산책한다. 점심으로 거문오름 근처의 정갈한 음식점에서 멍게비빔밥을 먹고 오름 탐방을 시작한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3시간 가까이 진행된 거문오름 탐방은 화산활동으로 인한 오름의 지질학적 의미와 곶자왈의 식생을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나무가 많은 거문오름과 달리 민둥산 모양의 용눈이오름으로 이동하여 제주의 세찬 바람과 확트인 조망을 즐기는 것으로 오늘의 트레킹을 마감한다.


이상무님이 합류하고 대방어와 감귤막걸리가 함께한 만찬은 풍성했다. 다만 염사장님께서 용눈이오름에서의 세찬 바람 탓인지 경미한 배탈이 나는 바람에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하신 게 아쉬웠다. 석식 후에는 때마침 제주도에 계셨던 박사장님의 친구분들과 카페에서 깜짝 만남이 이루어졌다. 박사장님의 초등학교 동창생분들로 골프를 치러 오셨다는 친구분들은 초면인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두 모임의 공통 멤버인 박사장님이 평소 서로의 모임에 대한 애기를 간간히 전해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모든 친구분들이 박사장님처럼 멋지고 여유와 유머가 넘치는 분들이어서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단히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시안컵 축구는 졸전 끝에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카타르에 0 대1로 지고 말았지만, 우리의 하루는 많은 골을 넣고 이긴 멋진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