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북한산 가을 산행 - 칼바위 능선에서 산성계곡으로 (2016년 10월 28일)

빌레이 2016. 10. 29. 03:48

손가락 부상을 당한 이후로 산행다운 산행을 하지 못했다. 그사이 가을은 훌쩍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한다. 실내 생활이 길어져서 그런지, 건조해진 날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없던 가려움증이 생겼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 가려움증도 나아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목요일까지 꽉 짜여진 일정 때문에 갑갑했던 심신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산으로 향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과 주변 권력자들이 선량한 국민들을 우롱하여 패닉 상태에 빠뜨리고 있는 작금의 현실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영원히 살 것처럼 탐욕과 부패에 찌들어 허망한 삶을 누리고 사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모두가 자연을 닮아서 순수하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이란 것을 조속히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칼바위 능선에 올라서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기브스 상태의 왼손 때문에 팔걸이 보호대를 착용하니 영락없는 외팔이 신세다.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불편한 몸이지만 산길을 걷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분이 개운해진다. 마당바위를 지나쳐서 평소에 자주 쉬던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공기 좋고 신선한 기운이 샘솟는 가을의 숲속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이 자리가 좋아서 한참을 머물기로 한다. 헤세의 책을 읽으면서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페퍼민트 차를 마신다. 혹독하게 더웠던 지난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따뜻한 것이 좋아지는 계절이 되었다. 숲속에서 듣는 이루마의 피아노 선율이 내 마음을 편안히 감싸준다. 


오른손만을 사용해서 칼바위 릿지를 오르는 것도 괜찮다. 고정 로프를 잡고 힘겹게 내려오던 외국인이 내가 한손으로 쉽사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눈치다. 평소보다는 조심성 있게 올라선 칼바위 정상에서 확 트인 조망을 맞이한다. 차 한잔과 함께 간식을 먹고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으며 또 한참을 쉬어 간다. 다소 흐린 하늘이 아쉽지만 가을날의 선명한 시야는 확보된다. 북으로는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을 지나서 영봉과 오봉이 이어지고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에서 정점을 찍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멋들어진 하늘금이 반갑다.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발 아래로 가을빛이 무르익은 정릉골의 숲이 드넓은 평야처럼 펼쳐진다. 형제봉 능선 너머로 차례로 오똑하게 서있는 북악산, 인왕산, 안산 봉우리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띈다.


애초에 발길 닿는 대로 산길을 걷고 싶어 나섰던 산행이다. 칼바위 능선에서 북한산성 성벽에 올라서서 보국문 방향으로 갈 길을 정한다. 비봉능선으로 내려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성문까지 숲속 오솔길을 택해서 걷는다. 그런데 산성계곡 주변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화려한 단풍으로 치장하고 나를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유혹에는 휘둘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비봉능선 방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미련없이 돌리기로 한다. 산성계곡 상단부부터 불타오르고 있는 단풍의 향연에 행복감이 밀려온다. 자칫하면 놓칠 수 밖에 없었던 올가을 단풍이었다. 새벽에 뿌린 비 때문에 한결 산뜻해진 빛깔의 단풍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산성계곡의 단풍은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변화무쌍하게 이어진다.                    


산성계곡 경치 중에서 으뜸이라는 산영루 맞은편의 계곡 한가운데 바위에 앉아서 점심을 먹는다. 아내가 집에서 만든 사과잼을 모닝빵에 듬뿍 넣은 샌드위치의 달콤함을 음미하면서 계곡 안쪽으로 들어앉은 산영루의 멋들어진 자태를 굽어본다. 풍경이 가히 예술적이다. 단풍이 물든 계곡 주변의 숲과 가을의 정취가 함께 머무는 이 공간이 신선들이 노니는 선계인 듯하다. 산영루 위에서 술 한잔 걸치며 풍류를 즐겼을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점심을 먹고 누각에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으나 안전과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출입을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아쉬울 따름이다. 산성계곡의 단풍은 산영루를 지나서 중성문 아래까지 내려와서도 계속 이어진다. 둘레길과 만나는 산성탐방안내소에 도착하여 뒤돌아 올려다보는 북한산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서 따뜻한 빛으로 물들고 있다. 오랜만에 찾은 북한산이어서 더욱 특별했던 감흥을 안겨주었던 가을날의 꿈 같은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