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란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읽었다. 대개는 원작에 감동 받은 후 나중에 나온 영화를 보면 아쉬운 대목이 많게 마련이다. 이번엔 보통 때와는 다르게 영화를 먼저 보았으니 별로 실망할 일은 없겠지 싶었다. 역시나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두 시간 여의 영화 화면 속에 짧지 않은 550 페이지 분량의 책 내용을 충실히 담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와일드>의 경우에 영화는 영화 대로 괜찮았고, 책은 책 대로 좋았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영화의 장면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기 때문인지 나에게 영화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원작에 대한 예고편 같이 느껴졌다. 영화가 책 속에 나오는 실제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구간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인지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것처럼 여겨졌다.
데이비드 린이 감독하고 오마샤리프가 주연한 영화 <닥터 지바고>가 대단한 걸작으로 평가 받기는 하지만 보리스 빠스체르나크의 원작 소설에 담겨 있는 사상적 깊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소설 속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얘기는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비중이 높지는 않다. <와일드>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가 시간에 틈틈히 읽은 책 <와일드>는 분명 영화와는 다른 깊이의 감동을 전해주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여러 날 동안 야생의 트레일을 걷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산을 사랑하고 산에 오래 다녔다고 자부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나는 비박을 하면서 여러 날을 야생에서 보내는 백패킹 트레킹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고작해야 산장이나 텐트에서 숙박 하면서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2, 3일 정도를 지낸 기억이 있을 뿐이다.
<와일드>를 읽고난 후 처음 찾아든 생각은 올해엔 꼭 비박 산행을 결행 해 봐야겠다는 다짐이다. 적절한 시기에 내가 좋아하고 내게 알맞은 형태의 백패킹 트레킹을 구상할 것이다. 4285 km라는 거대한 길이의 트레일이 아니라도 좋다.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관리 행태가 성숙되어 백두대간 만이라도 온전히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주말에 숙제 하듯 구간별로 꾸준히 대간길이나 정맥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캠핑이 유행하는 세태를 쫓을 생각은 더더욱 없다. 고요한 산 속에서 별빛 반짝이는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밤을 조그만 텐트 속에서 보내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야생의 밤을 구체화 시켜준 책이 있다면 단연 <와일드>가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와일드>는 내가 남기고 싶은 모양의 기록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1. PCT 구간 중에 있는 오리건주의 크레이터 레이크에서 캠핑하는 모습. 구글에서 다운 받은 사진으로 호수 위의 은하수가 인상적이다.
산에서 캠핑하면서 이런 비슷한 사진을 남길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도 이 호수를 지나게 된다.
2. 강남의 한 카페에서 사고로 공장 신세를 진 내차가 고쳐지기를 기다리면서 <와일드>를 읽었던 때가 떠오른다.
3.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이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했던 신들의 다리(Bridge of the Gods).
이 다리는 오리건주와 워싱턴주의 경계인 컬럼비아강 위에 세워져 있다. 사진은 구글에서 다운 받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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