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고왔던 작년 시월에 숨은벽 암릉을 등반한 후 인수C길 루트를 이어서 오르려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인수C길 등반은 접어두고 하산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인수C길은 언젠가 한 번은 올라야 할 루트로 뇌리에 남아 있었다. 비둘기길과 함께 인수봉 정상에 이르는 가장 짧은 코스로 알려진 인수C길은 모사길이라고도 부른다. 우이동에서 박교수님과 은경이를 7시 반에 만나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도선사까지 가는 택시를 타지 않고 백운산장까지 쉬엄쉬엄 걸어서 오른다. 하루재를 지나면 선명하게 보여야할 인수봉은 구름 속에 갇혔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선선한 가을날의 기온이 느껴지지만 약간은 흐린 날씨에 습기가 좀 느껴진다. 이런 날은 의외로 바위에 붙는 느낌이 좋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산장에서 숨을 돌린 후 인수봉 서면 하강 지점의 고개를 넘어서 모사길 초입에 도착한다. 북향이라서 그런지 쌀쌀함이 느껴진다. 건너편의 숨은벽 능선과 주변 숲은 추색이 완연하다. 그리 어려운 구간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직상 크랙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마디에 붙는다. 레이백 자세를 취하면서 전진하는데 초반의 디딤발이 미끌리는 느낌이다. 예상보다 쉽지 않은 바위 상태에 살짝 긴장하면서 첫 마디를 끝낸다. 확보점에는 오래 전에 설치된 유서 깊은 흔적의 피톤이 듬직하게 들어앉아 있다. 단단하게 박혀있는 하강용 피톤을 보면서 인수봉 서면 하강길이 밀리거나 바람이 세찰 때 대체 하강 코스로 이용했던 이유로 모사길을 후면 하강길로 부르던 선배가 떠오른다. 둘째 마디 출발점 앞의 바위 표면에 사마귀 한 마리가 아래쪽으로 머리를 향한채 버티고 있다. 붙박이처럼 꼼작도 하지 않고 있는 그 모습이 이채롭다.
둘째 마디는 우향 쌍크랙이다. 가운데 크랙에 붙어 캠 하나를 박고 오르는데 자세가 영 나오지 않는다. 가까스로 슬링이 매달린 확보점에 도착하여 왼쪽의 피톤에 확보한다. 다녀와서 다른 사람의 등반기를 읽어보니 맨 아래쪽의 크랙에서 레이백 자세로 오른 후 위쪽 크랙으로 올라 붙는 게 좋다고 한다. 셋째 마디와 넷째 마디는 상대적으로 쉬운 코스이다. 네 마디로 이루어진 모사길 등반을 마치면 인수릿지길과 합류하게 된다. 악어바위의 머리 바로 위에 모사길의 마지막 확보점이 있다. 여기서부터 인수봉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11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각에 등반을 종료한 탓인지 오랜만에 올라온 정상에는 아무도 없다. 점심을 먹고 있는 사이에 우리 뒤로 모사길을 따라 올라온 젊은 친구들 세 명이 도착한다. 외국인 한 명이 포함된 그들은 정상 위에 얹혀진 바위에서 볼더링을 하면서 등반의 여운을 즐기고 있다. 스포츠클라이밍 동작이 엿보이는 젊은 그들의 활발하고 명랑한 모습에서 생기가 전해진다.
처음 등반용으로 사용해본 블루워터 60미터 새 자일 한 동으로 두 번의 하강을 한다. 오후 시간을 즐기기 위하여 위문을 거쳐 백운대 남벽의 써미트 암장으로 향한다. 일반 산객들로 붐비는 등산로에서 안전벨트와 헬멧을 착용한채 걷는다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다. 산행하기에 정말 좋은 계절인 가을날의 주말인지라 백운대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을 방불케 한다.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문 써미트 암장 우측의 테라스에서 한참을 쉰 후 녹두장군길 등반에 나선다. 나란히 백운대 정상으로 진행하는 김개남장군길에는 이미 한 팀이 붙어서 등반 중에 있다.
전체적으로 페이스 형태를 이루고 있는 백운대 남벽 우측에서 시작하는 녹두장군길은 루트 소개 자료에 첫째 마디의 난이도가 5.10a로 나와 있다. 난이도에 걸맞게 출발점부터 첫 볼트 클립이 쉽지 않다. 피치 중간 지점의 세로 크랙에서는 적절한 홀드 찾기가 힘들었으나 다행히 크랙 속에 깊숙히 박혀 있는 녹슨 하켄을 발견할 수 있어서 안전하게 첫째 마디를 끝낼 수 있었다. 둘째 마디도 쉽지 않은 구간이다. 피치 출발점에서 보면 슬랩일 것 같은데 막상 붙어보면 첫 볼트 이후 부분이 페이스에 가깝다. 오래된 녹슨 볼트와 새로이 설치된 스테인리스 볼트가 섞여 있는 루트는 사선으로 이어져서 볼트따기 동작도 만만치 않다. 어렵사리 돌파하여 확보점에 도착한다. 일반 등산객들이 다니는 등로와 연결되는 오리바위 부근이 둘째 마디 확보점이다.
백운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우리가 등반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대는 것이 부담스럽다. 녹두장군길의 나머지 두 피치는 비교적 쉬운 슬랩 등반이 이어질 것이지만 주말에 오르는 것은 등산객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오르지 않기로 한다. 가능하면 조용하고 한적한 등반을 즐기고 싶어 하는 우리 팀의 스타일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의 자일 하강으로 내려와서 등반을 마무리하고 테라스에 둘러앉아 장비를 정리한다. 그동안 올라보고 싶었던 모사길과 녹두장군길을 안전하게 등반했다는 것이 여러모로 뜻깊었다.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머리 속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육체적 행위가 주를 이루는 곳에서는 몸이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내게는 예상보다 어려운 루트의 등반이었지만 어느 정도 잘 준비된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다. 크럭스 구간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루트를 살피고 적절한 곳에 캠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몸을 믿고 등반에 임할 수 있는 자심감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도 꾸준히 운동해서 안전하게 등반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만경대 우회로를 돌아서 용암문으로 가는 길 중간에 돌아서서 바라본 백운대 남벽은 곧게 뻗어내린 페이스 형태를 이루고 있다. 비가 오면 폭포로 변하는 물길의 흔적이 있는 깍아지른 절벽의 오른쪽 루트를 우리가 등반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압적인 직벽이다. 용암문을 지나 도선사로 내려오는 한적한 산길을 암벽장비 일체가 들어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오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그 마음 만큼이나 우이동까지 걸어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1. 인수C길 종료 지점은 악어바위 바로 위 지점이다.
2. 등반용으로 처음 사용한 블루워터 자일. 사용감이 좋은 편이다.
3. 인수봉 북서면은 단풍이 일찍 찾아온다.
4. 모사길 첫 피치 출발점에서 포즈를 취해본다.
5. 모사길 첫 피치 등반 장면이다.
6. 모사길 둘째 피치를 등반 중이다. 초반부는 아래쪽 크랙을 레이백 자세로 오르는 것이 편하다고 한다.
7. 모사길 셋째 피치를 오르고 있다. 비교적 쉬운 구간이다.
8. 첫 피치 확보점에서 후등자 확보 중이다.
9. 둘째 피치 출발점의 바위 표면에 버티고 있었던 사마귀가 이채롭다.
10. 숨은벽 능선과 인수릿지 사이의 골짜기는 추색이 완연하다.
11. 모사길 셋째 마디를 오르고 계시는 박교수님.
12. 인수봉 정상부에 피어 있는 구절초가 싱그럽다.
13. 올들어 자주 찾지 않았던 인수봉 정상에서 간만에 인증사진을 남겨본다.
14. 중간 표시가 없는 자일로 하강하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자일을 사려야 한다.
15.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위문을 통해 백운대 남벽으로 향하는 중이다.
16. 녹두장군길 첫 피치는 상당히 까다로운 구간이다.
17. 녹두장군길 첫 피치 확보점이다.
18. 인수C길의 사마귀처럼 녹두장군길을 지키고 있었던 하늘소 한 마리. 보호색 때문에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19. 녹두장군길 둘째 피치를 등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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