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청명한 초가을날의 춘클릿지 등반 - 2014년 9월 13일

빌레이 2014. 9. 13. 21:34

처음 만날 때는 까칠하지만 만날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느끼는 춘클릿지는 그런 사람을 닮았다. 5년 전 열 명이 넘는 대부대의 일원으로 처음 춘클릿지를 찾았을 때는 쌀쌀한 날씨의 늦가을이었다. 차가운 바위는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줄을 묶어야 하는 산만한 등반 속에서 재미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춘클릿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의암호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밟혀서 친구들과 단촐한 자일파티를 구성하여 해마다 춘클릿지에 오게 되었다. 등반 횟수가 거듭될수록 춘클은 친숙해졌고 올해부터는 스포츠클라이밍으로 준비가 잘된 몸 덕분인지 춘클에 오르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말일의 등반 때에 처음으로 춘클을 선등하여 만족스럽게 올랐다. 그 등반이 계기가 되어 난이도 있는 자연 암벽에서도 자신감이 상승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춘클은 여러모로 내게는 고마운 바윗길인 셈이다.

 

새벽 6시에 네 명의 자일파티가 모여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향한다. 청평을 지나 가평으로 가는 길 중간부터는 안개가 짙게 깔린다. 춘클은 등반하면서 내려다보는 의암호 주변 풍광이 으뜸인 곳이다. 처음으로 춘클 등반에 나서는 박교수님과 유집사님께 그 좋은 풍광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그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강촌을 지나면서부터 거짓말 같이 주변이 쾌청해진다. 의암댐에 도착하여 호숫가에 만들어진 자전거 도로를 따라 어프로치를 하는 동안 바라보는 주위 풍광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다. 저 멀리 보이는 오봉산과 용화산 너머의 하늘금은 넘실대는 하얀 구름 모자를 쓰고 있다. 잔잔한 호수 위로는 아름다운 학 한 마리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날고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의 풍광이 빼어나 유난히 자주 다녔던 삼악산 중턱에 들어앉은 하얀색 찻집 한 채까지 멋지게 보인다. 흰 구름, 하얀 학, 하얀색 집 모두가 순수한 자연 속의 백색이다. 깨끗한 초가을 날씨 속에서 더욱 빛나고 있다. 오늘의 등반도 이 날씨만큼이나 좋을 것 같은 예감이다.     

 

항상 그렇듯 첫째 마디는 조심스럽다. 몸도 덜 풀리고 암질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선등에 나선다. 언제나처럼 은경이가 선등자 빌레이를 맡는다. 유집사님이 세 번째로 오르면서 사진 촬영을 해주시고 박교수님이 라스트를 담당하는 시스템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통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7시 반 즈음의 시각에 어프로치를 시작한 우리 팀이 오늘 춘클릿지의 첫 주인이다. 셋째 마디까지 올라서서 간식을 먹는다. 그동안 우리 뒤를 따라오던 두 명의 자일파티가 넷째 마디를 먼저 오른다. 춘클이 처음인 박교수님과 유집사님도 오버행 구간에서 잠시 머뭇거릴뿐 별 어려움 없이 잘 올라오셨다. 피치가 거듭될수록 내 몸도 풀려서 초반의 긴장감이 등반의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예전엔 위압적으로 보이던 넷째 마디의 40미터 직벽도 평범한 루트처럼 보인다.

 

익숙함이란 참 편하다. 직벽을 오르는 맛을 어느새 즐기고 있지만 오버행 구간에 있는 볼트에 퀵드로를 걸 때에는 살짝 긴장감이 몰려온다. 그것도 잠시 지난 5월보다는 훨씬 쉽게 오버행을 통과한 후 안정감 있게 확보점에 도착하여 완료를 외친다. 걷는 구간을 포함한 나머지 마디들도 즐겁게 등반하여 자일파티 네 명이 안전하게 춘클릿지 종착점인 드름산 정상에 도착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과 오전 시간에는 그늘진 곳이 대부분인 춘클릿지의 방향 덕택에 최상의 조건에서 최고의 등반을 즐길 수 있었다. 자일파티 네 명이 한 몸 같이 협동함으로써 아무런 정체 현상 없이 일사천리로 물 흐르듯 자연스런 등반시스템을 구사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안전하고 즐거운 등반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감사함이 밀려온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에 춘클릿지 등반을 마무리 하고 의암바위 암장으로 하산하여 남은 오후 시간을 즐겨보기로 한다. 사방 팔방의 시야가 시원하게 열린 정상의 조망처럼 어떤 아쉬움도 없이 최고로 만족스런 춘클릿지 등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