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유성용의 <여행생활자> 독후감

빌레이 2014. 9. 19. 15:53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라는 부제가 붙은 여행 에세이집 <여행생활자>를 인상 깊게 보았다. 구입한지 꽤 된 책인데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요즘의 초가을 기후와 잘 어울린 탓인지 근래에 다시 펼쳐든 후로 쉽게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국제 학술회의 참석이 나의 주된 해외 출장의 목적인 만큼 중앙아시아 지역을 가볼 기회는 아직까지 없었다. 치안이 불안한 상태이고 위생 상태나 현대 문명의 혜택도 그다지 좋지 않은 지역이라서 쉽게 여행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는 더욱 미지의 세계로 여겨지는 곳이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여행생활자>는 저자인 유성용 씨가 수개월 동안 중국의 윈난성, 티벳, 인도, 스리랑카, 네팔, 파키스탄 등지를 여행한 느낌을 시처럼 함축적이고 무게 있는 문장으로 뽑아낸 에세이집이다.

 

유명한 여행지보다는 나그네처럼 흘러다니는 저자가 가고 싶은 곳을 발길 닿는 대로 탐험하듯 찾아나선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으면 생활인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현지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 일반인들은 쉽사리 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을 온갖 불편을 참아내며 찾아가는 저자의 용기가 가상하다. 책은 내가 호도협 트레킹을 했을 때 잠깐 들렀던 중국 윈난성에 있는 리장 고성의 밤 풍경부터 시작된다. 리장 고성의 미로를 따라 모세혈관처럼 흐르는 맑은 시냇물 위로 빛나던 아름다운 홍등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책의 앞 부분부터 나의 이목을 끌었던 이유이다. 그 뒤로는 내가 가보지 않았던 나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른 책과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관심 있게 보았던 티벳, 인도, 스리랑카, 네팔, 파키스탄 등에 대한 저자의 기록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그가 외롭고 쓸쓸하게 여행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바의 깊이를 보여준다. 생각의 깊이 만큼이나 저자가 카메라에 담아낸 그림들도 훌륭하다. 외롭게 여행하는 기간이 오래되면 혼자만의 사색이 깊어지게 되어 누구나 철학자나 구도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된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는 파키스탄 여행기가 가장 좋았다.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접경 지역의 여행은 종군 기자의 르포 기사를 넘어서는 것으로 현지의 생생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상의 마지막 낙원 같은 훈자에서 살구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며 머물던 대목에서는 여행과 생활의 구분이 모호했던 저자의 삶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분쟁 지역인 페샤와르, 천로역정으로 묘사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K2 가는 길 등의 여행기는 특별히 나의 눈길을 끌었다. 파미르 고원의 카라쿨 호수에서 저자의 쓸쓸한 여행기는 끝을 맺는다. 가을이면 나홀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직장과 현실 생활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사는 나에게 그런 시간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다. 좋은 책 <여행생활자>는 발이 묶여 떠나지 못하는 나에게 고독, 불편함, 부족함, 가난, 추위, 배고픔, 두통, 외로움, 쓸쓸함, 고단함 등과 같이 쉽게 부정적인 것들로 치부될 수 있는 개념들 속에도 인간의 행복이 별처럼 빛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