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크레타 섬에서의 메모

빌레이 2014. 9. 5. 11:22

며칠 전 개강을 준비하면서 자료 정리를 하던 중 지난 여름에 다녀온 학회에서 받은 메모장을 발견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던 중 기억해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 발표 내용을 메모해 둔 노트였다.

노트 안에는 숙소의 발코니에서 쉬던 중 불어오는 해풍이 정말 좋아서 그 느낌을 글로 남겨 둔 것도 있었다.

하찮은 잡문이지만 읽고 있노라니 그 순간의 행복감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하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두기로 한다. 

 

 

에게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부드러운 바람이 좋다

강렬한 햇살 아래 드리워진 그늘

이분법적인 단절이 자연 속에서도 가능함을 느낀다

그늘과 땡볕

양지와 음지의 차이가 이렇듯 선명하게 갈릴 수 있을까?

여름날의 소나기가 풀 뜯는 소의 잔등을 가르듯이

한 뼘 차이의 땅이 다른 기후 속이다

 

그늘 속에 들어앉아 오감으로 느껴보는 바람

시원하다는 표현이 부질없다

피부를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가는 에게 해의 바람

나무꾼의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다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 이렇듯 좋을까?

훤칠한 키와 크레타의 자연을 닮은 구릿빛 피부

조르바의 딸 같은 인상을 풍기는 택시 운전사 아가씨처럼

먼 길 돌아 크레타 섬에 찾아온 나그네를 반겨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선물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무성한 파초 나뭇잎들의 흔들림이 바람을 알린다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의 떨림처럼 살랑대는 잔잔한 움직임

순도 높은 이 바람은 갯비린내도 풍기지 않는다

강렬한 쪽빛과 투명한 에메랄드 빛을 넘나드는

에게 해의 푸른 물빛

지중해풍의 백색 회칠이 햇볕에 반짝이는

눈부신 하얀 색깔을 닮은 바람이다

 

절대 순수를 그리며

황토빛 기와지붕 아래

진한 갈색의 테라스 난간에 두 다리 올려놓고

등나무 의자에 앉아 즐겨보는

남국의 게으른 휴식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