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설악산 석주길 등반 - 2014년 8월 15일 광복절

빌레이 2014. 8. 16. 11:41

설악산의 천화대 암릉에서 설악골로 뻗어내린 릿지길은 세 개가 있다. 공룡릉에 가까운 순서로 석주길, 염라길, 흑범길이 차례로 자리한다. 설악골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하는 석주길은 1969년 요델산악회에서 산악인 엄홍석과 신현주를 기리기 위해 개척한 유서 깊은 암릉길이다. 예전부터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길이었다. 작년의 천화대 등반에서 길을 잘 못 들어 흑범길 말미로 올라선 바람에 왕관봉에서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을 달래고 싶은 생각에 희야봉까지 이어지는 석주길 등반을 계획하게 되었다.

 

자일파티 4명이 목요일 밤 11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고속도로의 가평휴게소에서 식사를 한다. 한계삼거리 직전의 설악휴게소에서 한 번 더 쉬고 설악동 주차장에 도착하여 어프로치를 시작한 시각은 새벽 3시 정각이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설악골의 희미한 등로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 골짜기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여명이 밝아온다. 천화대 암릉의 봉우리들로 주변 지형을 가늠하여 석주길 초입에 어느 정도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설악골 좌측으로 건너온다. 확실한 산길이 보여서 우선 반갑다. 석주길 표지를 지난 것이 아닌가 하여 잠시 짐을 내려두고 나 혼자 길을 따라 내려가 본다. 얼마 가지 않아서 대구에서 왔다는 4명의 한 팀을 만나 길을 물어본다. 짐을 놔두고 내려온 바로 위에 석주길 표지석이 기다리고 있다. 약간 허탈한 순간이다.

 

어둠을 가르며 고생스런 어프로치를 끝내고 석주길 출발점에 도착한 시각은 6시 경이다. 잠이 부족한 무박 산행의 피로감 때문에 힘겨운 등반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깜깜한 계곡길에서 3시간의 어프로치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같은 암장 출신들 네 명이 왔다는 대구팀은 첫 피치를 우회하여 우리를 앞서 나간다. 초행이기 때문에 지체가 염려되지 않는 팀이 우리 앞에 등반한다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 장비를 착용하고 간단히 간식을 먹은 후 출발한다. 내가 선등을 서고 은경이가 쎄컨, 유집사님이 다음을 따르고 박교수님이 라스트를 맡는다. 어렵지 않은 첫 피치를 올라서니 서서히 전망이 트인다.

 

석주길은 전반적으로 초급 수준의 난이도에 피치 사이가 길고 어프로치와 하산길이 만만치 않다. 암벽등반을 즐기는 이들의 관점에서는 별로 큰 매력이 없는 코스라 할 수 있다. 새롭게 설치된 볼트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녹슨 하켄 몇 개가 이 길이 등반 코스임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설악골 깊숙한 곳에 자리해서 주변 풍광 만큼은 으뜸이다. 세존봉과 마등령에서 시작되는 공룡릉이 등반로 오른쪽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나한봉을 거쳐 1275봉과 범봉으로 이어지는 하늘금은 등반 내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릿지길 왼쪽으로는 염라길과 흑범길이 코 앞에서 나란히 이어지고 천화대의 멋들어진 암릉이 동양화 화폭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희야봉의 칼날능선에서 천화대 릿지길과 만나는 석주길은 희야봉 정상에서 석주동판이 있는 안부로 두 번의 30미터 하강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피치는 확실치 않으나 개념도 상에는 총 9피치로 되어 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군데군데 자리한 비박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범봉 연봉을 등반함으로써 등반의 만족감을 높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하산하기로 한다. 작년에 왕관봉에서 탈출했던 길로 어프로치를 해서 천화대 릿지의 마지막 부분을 등반하고 범봉까지 오를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만족스런 마음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범봉과 희야봉 사이의 안부에 자리한 비박터 주변은 불결했다. 아직도 등반자들 사이에 환경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아름다운 자연을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서는 가능한한 비박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석주길 등반을 마치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비선대산장에 도착한다. 설악동 매표소를 통과한지 꼬박 12시간이 소요되었다. 설악의 다른 등반 루트에 비해 접근과 하산길이 길어서 힘겨운 산행이었다. 희야봉 정상부부터는 구름 속이어서 전망이 없었으나 그 전까지는 외설악의 내밀한 풍광을 유감없이 즐길 수 있었던 날씨였다. 

 

▲ 천화대 릿지길과 만나는 희야봉 정상부의 칼날능선을 등반 중이다.

▲ 주위가 어둠 속인 새벽 3시 경에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 어둠 속에서 설악골을 거슬러 올라가 어렵게 찾은 석주길 표지석. 

▲ 표지석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석주길 능선이 시작된다.

▲ 석주길 첫 피치를 등반 중이다.

▲ 두 번째 피치 말미의 침니 부분을 등반 중이다.

▲ 석주길은 칼날능선 형태의 바윗길이 많다.

▲ 석주길 등반로의 난이도는 별로 높지 않다.

▲ 네 명으로 구성된 대구팀이 우리 앞에서 등반하는 모습이 아스라히 보인다.

▲ 멀리서 보면 어려울 듯한 피치도 붙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 석주길 릿지는 설악골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 석주길은 우회로가 잘 되어 있어서 시간에 따른 선택의 폭이 넓은 듯하다.

▲ 석주길 최고의 전망 포인트에서 본 풍경. 맨 좌측이 희야봉,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범봉 연봉.

▲ 전망 포인트에서 올라서면 새로운 피치의 출발점이다.

▲ 우회 루트의 트래버스 구간 아래는 낭떨어지이지만 손홀드가 좋아서 괜찮다.

▲ 석주길 좌측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흑범길을 등반하는 클라이머들이 보인다.

▲ 작년의 천화대 등반에서 올랐던 왕관봉이 상투머리처럼 보인다.

▲ 가끔은 홀드가 확실치 않고 푸석거리는 바위가 많아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크랙이 이어지는 이 피치를 올라서면 천화대 릿지길과 합류한다.

▲ 석주길과 천화대길이 만나서 이어지는 희야봉 정상부의 나이프릿지 구간.

▲ 나이프릿지의 우측은 끝간 데 모르는 낭떨어지로 고도감이 상당하다.

▲ 희야봉 정상부로 올라서서 후등자 확보 중이다.

▲ 천화대길과 만나는 지점엔 날개미들이 우글거려서 머물기가 힘들 정도였다.

▲ 나이프릿지를 등반 중인 박교수님의 모습.

▲ 우리를 앞서간 대구팀은 작은 범봉 밑의 안부에서 범봉 연봉 등반을 준비 중이다.

▲ 희야봉 정상에서 바라본 작은 범봉. 여기부터는 구름이 주위를 감싼다.

 

▲ 희야봉 정상에서 30미터 하강 두 번으로 안부에 내려선다.

▲ 범봉과 희야봉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석주동판.

▲ 하산할 때 본 설악골의 비경. 수십 개의 폭포가 이어진 아름다운 계곡미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