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짬짬이 읽고 있는 책이 곽재구 시인의 신간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이다. 시인이 쓴 산문을 읽는 느낌은 좀 다르다. 수필가나 소설가가 쓴 산문에 비해 풍부하고 여린 감성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문장이 간결하고 단아한 느낌을 전해준다. 대표적으로 김용택 시인의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와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를 읽은 후에 받은 느낌은 그 전에 봐오던 수필들과는 사뭇 달랐다. 곽재구 시인의 산문집들도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인 특유의 잔잔한 감흥이 전해진다.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길귀신의 노래>를 사두었다가 최신작인 <길귀신의 노래>부터 손에 들었다.
시인의 여린 감성은 막 피어나는 반투명의 연두 빛깔 새이파리 같다. 새생명을 움트게 하는 봄햇살은 이 세상 만물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차별 없이 비춰주는 따스한 봄햇살처럼 고단한 서민들의 삶 속에도 소중한 그들만의 행복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길귀신의 노래>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일상 속의 사랑스런 풍경들을 가감 없이 전해주고 있다. 이 책 속에는 발표된 지 서른 해를 넘긴 시인의 등단작인 <사평역에서>에 관한 글이 있다. "<사평역에서>를 위하여"란 제목의 이 글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얽힌 얘기를 탄생 배경부터 삼십여 년 동안 자신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뒷얘기를 펼쳐놓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젊은 시절 운명처럼 내게 찾아온 시 <사평역에서>에 관한 얘기를 작자로부터 직접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읽은 이 글이 정말 흥미로웠다.
나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나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처음으로 부모님의 곁을 떠난 순간이었다. 시골뜨기인 나에게 도회지 생활은 정말로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으라면 고등학교 1학년 때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고 해마다 이 즈음이면 선홍빛 철쭉꽃이 교정의 화단과 바위 언덕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이 시기를 맞추어 학교에서는 교내 백일장이 열렸었고 운 좋게 당선되어 상을 받았었다. 도회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겨웠던 그 시절에 단비와도 같았던 환희의 순간이었다. 내가 무슨 작품을 썼는 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그 때 부상으로 받았던 시집은 지금도 내 곁에 머물고 있다. 그 시집이 바로 <사평역에서>이다. 책을 살 돈도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인지라 나는 상품으로 받은 이 시집을 수십 번은 읽었던 것 같다. 이렇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시집의 저자인 곽재구 시인이기에 이후에도 그의 글이라면 자연스레 마음이 끌렸다.
오늘 저녁 식사는 졸업한 제자들이 찾아와 함께 나누었다. 십여 명의 제자들과 어울려 그동안 살아온 얘기들을 나누다보니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지는 듯했다. 학교를 떠나 직장에서 힘겹게 분투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견스럽고, 한편으론 짠했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선생이나마 시간 내서 찾아와 주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여객선 침몰 사고로 마음이 허허로운 요즘이어서 그런지 더욱 제자들의 모습 하나 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결국 세상은 가슴 밑바닥에 이렇게 사랑스런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 곽재구 시인은 "시간과 길"을 기억하며 사랑한다고 했다. 지내온 시간과 걸어온 길이 사랑을 담고 있을 때 그 삶은 진정 아름다운 것일 게다. 헌책의 구수한 묵은내를 풍기며 삼십여 년이 흘러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사평역에서>의 낡은 책장을 다시 한 번 펼쳐본다.
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1. 곽재구 시인의 책들. 세 권의 산문집은 최근에 구입한 것이고 시집은 삼십 년 넘게 내 곁에 머물고 있다.
2. 곽재구 시인의 얼굴도 많이 변했다. 오른 쪽은 교내 백일장 상품으로 받은 <사평역에서> 시집 초판본이다.
3. 비닐 책표지를 입혀서 그런지 아직까지 표지는 그리 낡지 않았다.
4. 시집 초판본은 1983년도에 출판되었다. 테두리는 누렇게 낡아서 헌책의 묵은내를 구수하게 풍긴다.
5. 고등학교 시절에 자주 놀러갔던 '나라서적'이 반갑다. 지금은 사라졌다는 광주의 대표적인 서점이었다.
6. 최근의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는 "<사평역에서>를 위하여"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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