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1월은 항상 분주하다. 이런 저런 일들이 겹치기 일쑤다. 보고 싶은 사람 만나러 지방에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알프스 등반을 같이 한 허선생님이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얼굴 한 번 볼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간 틈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일상에 메어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적어도 올해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여 무작정 대구에 가기로 마음을 정한다. 새벽 5시에 애마를 운전하여 대구로 향한다. 중부내륙 고속도로에서 맞이한 일출이 찬란하다. 참으로 오랜만의 새벽 운전이다. 아침 9시가 안 되어 허선생님의 집앞에 도착한다. 커피 한 잔을 대접받으며 새로 출판될 트레킹 책의 가제본을 감상한다. 몽블랑 주위를 도는 TMB처럼 마터호른을 중심에 두고 둘레를 트레킹하는 루트가 새롭고, 가제본 책에 수공예품 만들 듯 정성을 기울인 허샘의 흔적이 엿보여서 신선하다.
허샘과 함께 팔공산에 오른다. 부인사와 수태골주차장 사이의 소로로 진입하여 너럭바위를 지나 완만한 오솔길을 오른다. 솔숲 사이로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제낀다. 원성스님의 책 <풍경>이 떠오른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책장에서 오래된 책을 찾아내어 펼쳐본다. 아마도 책에 실려있는 시 <청솔 아래서> 중 "산새들 울음 소리 / 시냇물 소리 / 바람이 연주하는 / 산대나무, 풀잎 소리... / 이대로 드러누워 / 나무가 될래요./ 바람이 될래요./ 산이 될래요."란 구절에서 느껴진 감흥을 팔공산의 소나무 숲에 불어오는 바람이 일깨워 준 모양이다. 한티재에서 이어지는 주릉 위에 얹힌 마당재에서 서봉으로 향한다. 팔공산 주능선의 장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가산에서 한티재를 넘어 팔공산 주릉을 따라 관봉까지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연무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인다. 따스한 햇볕 받으며 전망 좋은 바위턱에 앉아 김밥과 함께 한담을 나눈다.
조령산에서 신선암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닮아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한 마루금을 따른다. 안내판에는 톱날능선으로 표시된 이 구간을 지나 서봉 아래의 삼성암터에 이른다. 팔공산에서 처음으로 허샘과 하룻밤을 함께 지냈던 곳이다. 오소리가 텐트를 찢어 놓은 기억이 생생한 그곳에 이제는 멋드러진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가운데에 탁자를 두고 둘레에 걸터 앉아 쉴 수 있는 구조로 등산객들의 편의를 생각한 건축물이 고맙게 느껴진다. 팔각정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긴 후 서봉에 올라 주위 풍광을 감상한다. 3년 전 그때 처음으로 팔공산에 와서 밤을 보낸 후 달콤한 새벽잠에 취해 있는 허샘을 뒤로 하고 혼자 일출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암벽등반 장비와 텐트까지 들어있는 배낭을 짊어진 허샘에 대한 배려 없이 험한 능선길로 하산하자고 했던 것도 생각나 공연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번엔 수태골 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계곡길을 택하여 하산한다. 허샘의 책 <해골바위>에 등장하는 바윗골의 암장도 구경한다. 슬랩에 비친 나목의 그림자가 화폭 속의 추상화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차장으로 내려와 산행을 마무리 한다. 애마를 세워둔 곳으로 가는 길 중간의 저수지에서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며 서봉을 올려다본다. 물 위에 반사된 팔공산 정상부가 멋지다. 늦가을 정취를 온전히 담아 둔 그릇 같은 맑은 저수지에 우리들의 팔공산 산행 추억도 고스란히 담겨 있을 듯하다.
내차로 돌아온 다음 군위에 있는 제2석굴암을 관람하기로 한다. 한티재를 넘어야 하는 구절양장의 한산한 고갯길이 김광석의 노래 들으며 드라이브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노랗게 물든 낙엽송 군락이 늦가을 여행자들의 눈길을 편안히 머물게 한다.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외진 곳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적한 장소에 제2석굴암이 있다. 경주 토암산의 석굴암과 닮았다 하여 제2석굴암인 모양이다. 자연 동굴처럼 보이는 절벽 중간의 석굴에 있는 불상을 감상한다. 원조 석굴암보다 오히려 석굴암이란 명칭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변의 지형과 소나무 숲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그러고 보니 허샘을 만나러 간 대구 여행에서는 예상치 않은 문화 유적을 덤으로 관람하는 행운이 함께 해서 더욱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다. 지난 봄날의 청라언덕과 근대로의 여행도 그랬다. 허샘의 사모님과 산악영화제 일로 출장오신 월간 <사람과 산>의 임기자님이 합류해서 더욱 뜻깊었던 저녁식사 자리까지 모든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던 대구와 팔공산 나들이였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글귀가 있다. 벗이 찾아와 주는 즐거움이 크지만, 멀리 있는 벗을 찾아가는 기쁨은 가는 동안의 설레임과 돌아오는 길의 포근함까지 더해지니 더욱 풍성한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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