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늘까지 계속 된다. 더위로 달궈진 대지를 식혀주는 이 비가 단비처럼 반갑다. 지난 주 종강을 하고 이번 주부터는 기말고사 기간이다. 모처럼 약속된 일정이 없어 오늘 하루를 아내와 함께 집에서 보내기로 한다. 비가 내리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시원해진 공기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어 식탁에 앉아 그간 조금씩 봐오던 <알프스에서 온 엽서> 2권을 펼친다. 가끔은 식탁에서 맞은편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맛이 괜찮다. 집안일을 얼추 마친 아내도 식탁에 앉아 자신이 읽어오던 책을 조용히 펼쳐든다. 아내는 대학시절 도서관 옆자리에 앉아 시험공부 같이 하던 때의 분위기 같다며 좋아한다.
허긍열 선생의 "몽믈랑 자락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알프스에서 온 엽서>는 최근 다섯 권까지 출판되었다. 책 출판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허선생님을 청라언덕의 봄꽃이 만발하던 지난 봄에 뵐 수 있었다. 조금은 초췌해보이던 그때의 모습 속에서 책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다시금 엿볼 수 있었다. 대구에 다녀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했던 책들이 한 권 두 권 완성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일처럼 기뻤었다. 반가운 마음과 얼른 신간을 대하고 싶은 설레임으로 출간 되자마자 책을 주문하여 손에 들고 대충 훑어보기는 했으나 차분히 읽을만한 시간은 잘 나지 않았다. 일상에 쫒기다 보니 그리 된 것이지만 오늘이라도 미뤄둔 독서를 즐길 수 있으니 다행이다.
<엽서> 1권은 2010년 가을에 도서출판 한국산악회에서 출간한 같은 제목의 책에 실린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저자가 <알프스에서 온 엽서>를 시리즈로 출판하겠다는 기획을 한 이후 제대로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재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개정증보판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책은 초판이 시중에 나온 이후 저자 스스로 느꼈을 아쉬운 부분을 채운 것이기에 다시 봐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읽고 싶은 글이라 생각되면 어떤 것이든 정독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독서 습관 때문에 초판을 읽은지 3년 가까이 되었지만 책 내용은 익숙하다. 초판을 가져다 놓고 달라진 점들을 비교하면서 눈에 띠는 부분을 대충 훑어본다. 개정증보판은 나중에 다시 꼼꼼히 보리라 마음 먹은 후 새로운 내용이 궁금한 <엽서> 2권을 손에 들고 정독에 들어간다.
저자가 샤모니에서 생활한지 십여 년 흐르는 동안의 기록들을 시기 순으로 편집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엽서> 2권은 2003년 겨울부터 2007년 여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예전에 가끔 들렀던 인터넷사이트인 고알프스의 ALPS편지 게시판에 올라있던 에세이를 재편집한 내용도 있으니 옛날 사진을 볼때 느껴지는 아련한 반가움이 있다. 저자가 샤모니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이후 몽블랑 산군을 주무대로 하여 열정적인 알파인 등반을 펼치던 시기의 진솔하고 경쾌한 산행기는 독자를 곧바로 등반 현장 속으로 끌어들인다. 등반가이드가 되기 위하여 준비 중인 현지의 젊은 산악인들과 자일파티를 이루어 부지런히 도전적인 알파인 등반을 이어가던 시절의 일상이 예사롭지 않다. 일기와 같이 꾸밈없는 글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젊은날의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가진 것 없어 초라했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방황했지만 돌이켜보면 항상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삶이 더욱 빛나고 소중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산행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알파인 등반의 특성 상 자일파티를 이루는 동료들이 함께 할 때 안전하고 즐겁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을 때 실망하지 않고 혼자만의 산행을 계획하는 저자의 열정은 본받을만 하다. 현지 산악인이 약속한 등반을 펑크냈을 때 홀로 몽믈랑 스키 산행을 감행하는 부분은 특별히 인상적이다. 흔치않게 몽블랑 정상에서 석양을 바라볼 수 있었던 그 날의 단독 등반은 독자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에게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순간일 것이다. 플랑데귀 근방에서 스키 한짝을 잃어버린 이야기는 내게 더욱 각별히 다가온다. 나 또한 그곳에서 멀지 않은 플랑데귀 산장에서 내려오던 중 근처에서 시계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이 <엽서> 2권에는 들어있다.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가끔씩 엽서로 전해주는 친구의 소식을 한 권의 앨범에 담아놓고 펼쳐보는 듯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좋다.
1. <엽서> 시리즈는 최근 5권까지 발간되었다. 1권은 한국산악회에서 펴낸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2. 개정증보판에는 초판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부분과 빠뜨린 사진이나 그림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
3. <알프스에서 온 엽서> 시리즈는 연작답게 편집에 통일성을 부여한 듯하다.
4. <엽서> 시리즈는 흑백 사진이 삽화로 들어있으나 글과 연관된 알프스의 풍광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5. 사진집으로 출간된 <알프스 알파인 등반>에서 관련 그림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6. 아내와 둘이 식탁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저녁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멸치쌈밥이다.
어머니께서 고향집 텃밭에서 기른 햇마늘이 특별히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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