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발터 보나티의 <내 생애의 산들>

빌레이 2013. 6. 24. 06:07

산악 잡지나 산서를 통하여 발터 보나티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가 어떠한지 세밀히 알 수 있는 자료는 대하기 힘들었다. 허긍열 선생이 번역한 <위험의 저편>은 위대한 등반가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묶은 책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보나티의 사상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고, 나중에 그와 관련된 책이 출판 된다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최근 출판된 허선생님의 연작 <알프스에서 온 엽서> 3권을 읽던 중 다시 보나티를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이 책의 영문판일 듯한 <The Mountains of My Life>를 읽으면서 보나티의 숨결이 닿아있는 몽블랑 산군을 허선생님이 직접 산악스키로 돌아보는 장면이 <엽서> 3권에 들어있다. 이 부분을 읽고난 후 곧바로 몇 달 전에 사두고 읽지 못했던 <내 생애의 산들>을 펼쳐들었다. 김영도 선생님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하신 한글판이다.

 

"산은 나에게 처음부터 자아를 실현하는 최고의 장소였다"로 시작되는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발터 보나티의 글은 정말 진한 감동과 매우 독창적이고 올곧은 그의 사상을 내게 심어주었다. 알피니즘은 어디까지나 성취이고 도피가 아니며, 알피니즘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을 단호히 배격하는 그의 자세는 멋지다. 보나티는 산에서 경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등반을 하는 동안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이타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았다. 얼핏보면 알피니스트로서 보나티의 생애는 불행해보인다. 하지만 그가 쓴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내 생애의 산들>을 읽고나면 보나티가 인간들 사이에서 겪은 곤란한 일들마저 불가능해보이는 직등 루트를 넘어서는 그의 등반스타일처럼 멋지게 극복해낸 행복한 사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책의 전반부에 나오는 그랑 카퓌셍 동벽 초등기를 보는 동안 전율을 느꼈다. 이 전에 읽었던 어떤 등반기도 보나티의 그랑 카퓌셍 초등기만한 감동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드류의 직등 루트라 할 수 있는 남서벽을 단독등반으로 오른 얘기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측정할 수 없게 만든다. 등반하는 동안 새로운 우주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는 보나티의 말처럼 이 놀라운 얘기는 아마도 전무후무한 등반기가 될 것이다. 헤르만 불의 등반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경이적이고 특별한 기록들이 보나티의 등반엔 들어있는 듯하다. 이 외에도 몽블랑 산군에서 행한 그의 모험적인 등반기는 하나 하나가 감동적이다. 등반가로서는 감추고 싶은 실패담이나 동료들이 죽어가는 슬픈 이야기들도 가감없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책의 진실성은 어느 등반기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몽블랑의 브루이야르 붉은 암릉, 프레니 중앙릉, 퓨트리 대암릉 등반기와 그랑드조라스 북벽 동계 초등기, 마터호른 북벽 동계 단독 초등기, 남미의 파타고니아 산군에서 행한 탐험적인 등반기 등은 읽는 동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을 갖게한다. 1965년, 등반가로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35세의 나이에 "알피니즘이여 안녕!"이란 글을 남기고 알파인등반가의 길을 접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장면은 안타깝고도 숙연한 기분이 전해진다. 그 후 30여 년 후인 1984년에 쓴 "몽블랑에 끌려 돌아오다"란 몽블랑 퓨트리 능선 산행기는 한 철학자가 깊은 사색을 하면서 고향의 산에 오르는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되는 글귀들로 이루어져 있다. 불가능의 영역을 넘나드는 박진감 넘치는 등반기와 함께 책 속에서 또다른 책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관조적인 노년의 이 등반기는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수준높은 에세이란 생각이다.

 

허선생님의 <엽서> 시리즈에는 알프스 산록의 텐트 안에서 책을 읽었다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나는 산에 가면서 배낭에 책을 담아간 적이 없었는데 홀로 산행할 때는 허선생님처럼 그렇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보나티의 이 책에 빠져있던 중 북한산에 혼자 산행할 기회가 생겼다. 바위턱에 앉아 서너 번 쉬면서 두어 시간 책을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산에서 산서 읽는 맛이 특별했다고나 할까. 요세미티에 가기 전 읽은 존 뮤어의 <마운틴 에세이>가 있었기에 그 산은 더욱 특별한 감동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몽블랑 산군에 가기 전 발터 보나티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몽탕베르에서 드류를 처음 올려다보았을 때는 서벽을 오르고 있는 헤르만 불을 떠올렸었다. 다시 드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면 이제는 그가 완전무결한 산에 완벽한 루트라 칭송했던 프티 드류 남서릉을 단독등반하고 있는 위대한 등반가 발터 보나티의 환상이 자연스레 떠오를 것 같다.

 

알피니즘과 안녕을 고할 때 보나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산은 한마디로 나라는 인간의 일부라는 것이다. 산이 나에게 준 여러 경험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이었다. 산에서 힘들었던 경험 모두가 내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몽블랑에 다시 돌아와 긴 퓨트리 능선을 오른 등반기의 말미는 이렇게 마무리 한다. "몽블랑을 떠도는 동안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존재하는 것의 아름다움에 내 마음이 동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진실한 가능성인 예측을 초월한 마음의 진실을 끝내 찾게 된다."

 

1. 집 뒤의 북한산에 오르던 중 바위에 앉아 쉬면서 책을 읽어본다.

 

2. 북한산 칼바위 정상에서 잠시 쉬면서 책을 펼쳐본다.

 

3. 북한산 대동문 기둥에 기대 앉아 한참 동안 보나티의 책을 읽는다.

 

4. 발터 보나티의 책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경이적인 등반기들로 가득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