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준비와 밀린 연구과제의 논문 때문에 지난 한 주간을 좀 빡빡히 보냈다.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춘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연신 하품이다. 친구 정신이의 차로 청담동을 출발해서 의암호 도로변 주차장에 도착하여 어프로치를 시작한 시각이 아침 8시 쯤이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 하여 등반이 망설여진다. 날씨도 개운치 않고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어느 때보다 조심성 있게 등반에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등반은 생략하고 워킹 산행이나 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긴다.
춘클릿지는 어프로치가 짧고 등반 내내 의암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일품이어서 등반이 즐겁다. 하지만 날카롭고 매끈하게 갈라지는 규암 계열의 바위질은 화강암과는 다른 감촉이다. 늦가을 쌀쌀한 날씨엔 차가운 느낌이 별로였던 기억이 있다. 오늘도 바위가 물기에 젖어있는 상태라서 은근히 걱정된다. 정신이는 1 피치를 가볍게 선등한다. 내가 두 번째로 슈퍼베이직을 장착하고 올라보니 손에 닿는 홀드마다 물기에 젖어 미끈거린다. 확신 없는 홀드를 잡는 기분이 좋지 않아 등반 도중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니 결국 짧은 오버행이 버티고 있는 피치 말미에서 올라가지 못하고 하강해버린다.
나는 워킹으로 우회해서 첫째 마디로 가고 은경이는 정신이의 간접확보로 등반한다. 정신이와 은경이 둘이서 등반하라고 하고 나는 워킹으로 올라가면서 사진이나 찍겠다고 말한다. 순간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발목 부상의 기억 때문에 무모한 등반은 삼가하자는 다짐을 했지만, 한 팀으로 움직여야할 내가 빠지면 친구들이 의기소침해질 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은 라스트로 조심하면서 따라가 보기로 한다. 등반을 같이 하기로 결정한 이상 자신감을 갖고 즐겨보자는 마음을 먹는다. 2 피치는 상대적으로 쉽게 오른다. 두 번째로 오른 은경이를 눈여겨본 후 생각하면서 등반하니 괜찮아지는 느낌이다. 몸도 서서히 풀리는 것 같다.
정신이가 3 피치를 출발하자마자 비가 쏟아진다. 정신이는 피치 중간의 오버행 바위 그늘에서 비를 피하고, 은경이와 나도 바위에 바짝 붙어서 비가 얼른 그치기만을 기다린다. 얼른 그칠 것 같지 않던 비는 십여 분이 지나자 거짓말 같이 멈춘다. 다시 정신이가 출발하여 마디를 끊고, 내가 두 번째로 올라본다. 오버행도 자신감을 갖고 대하니 생각보다는 쉽게 돌파한다. 은경이까지 무사히 올라온 3 피치 정상에서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삼악산 중턱에 걸친 구름이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는 모습이 절경이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데 다른 한 팀이 올라온다.
우리 뒤를 선등으로 사뿐사뿐 경쾌하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이전 피치에서 "완료"라고 외치던 소리도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의 톤이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스포츠 클라이밍의 최고수인 손정준 선생이었다. 내가 정중히 아는 체를 하고 손 선생님이 맞냐고 했더니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해맑은 그 모습이 사람 좋은 인상이다. 우연히도 최근에 유투브에서 손 선생의 동영상을 즐겨봤었는데 실제로 대면하게 되니 반갑고도 기쁜 마음이다. 청소년들이 아이돌 스타를 직접 본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손 선생은 사모님과 둘이서 자일파티를 이루고 계셨다. 춘천에 행사가 있는데 소풍삼아 춘클릿지에 들렀다고 하신다. 날씨 때문인지 우리 두 팀 외에는 다른 등반팀이 없어서 여유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짧은 하강을 하고 우리가 간식을 먹으며 한참을 쉬고 있으려니 손 선생이 먼저 가겠다는 양해를 정중히 구하신다. 우리는 기꺼이 양보하고, 충분히 쉬면서 춘클의 하일라이트인 4 피치 직벽을 등반하는 손 선생을 유심히 관찰한다. 정말 새처럼 가볍게 오르는 그 몸짓이 리듬을 타는 무용수의 그것처럼 멋지다. 자일로 뒤이어 오르는 사모님을 확보하는 모습도 부부의 일체감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름다운 자일파티의 공연을 본 것 같은 흐뭇함이 남는다.
우리도 뒤이어 직벽에 붙는다. 선등하는 정신이도 거침없이 잘 오른다. 뒤이어 은경이가 간접확보로 오른다. 30 미터가 넘어가는 피치 길이를 줄이기 위해서 첫 볼트까지 은경이와 내가 같이 오른 후 은경이가 먼저 가고 내가 라스트로 오른다. 은경이를 확보하면서 정신이가 손정준 선생과 재미 있게 대화하는 소리가 아래까지 들린다. 확보자가 집중하지 않으면 뒤에 오르는 사람이 불안하기 마련인데 은경이가 신경쓰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된다. 하지만 어차피 자일만 잘 당겨주면 후등자는 믿고 올라야하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은경이의 확보로 비교적 쉽게 오르니 그때까지 손 선생 부부가 친구들과 대화 중이다.
전망 좋은 4 피치 정상에서 손정준 선생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한다. 가장 어려운 4 피치를 끝내고 나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힘이 빠진다. 초콜릿 등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천천히 나머지 피치의 등반을 안전하게 마친다. 5, 6, 7 피치에서는 몸도 완전히 풀리고 더 이상 비도 내리지 않아 등반이 아주 즐겁다. 드름산 정상에 도착하니 햇볕이 비친다. 의암호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소나무 그늘의 테라스에서 과일과 남은 음식을 먹으며 장비를 정리한다. 1 피치에서 등반을 망설였던 것이 못내 아쉽고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으나 피치가 거듭될수록 모든 것이 좋아지니 결국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등반이 되었다.
1. 스포츠 클라이밍의 최고수인 손정준 선생을 만나서 즐거웠다. 나이도 같고 고향도 같은 남도라고 해서 더욱 반가웠다.
2. 의암호 노변 주차장에 주차하고 짧은 어프로치를 하면 춘클릿지가 시작된다.
3.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 속에 1 피치 등반이 시작된다.
4. 첫 피치 확보점에서의 풍경. 삼악산 중턱의 구름이 멋지다.
5. 등반 초반엔 물기 머금은 바위가 많이 미끌렸으나 정신이는 선등으로 잘 오른다.
6. 3 피치를 등반 중인 은경이 너머로 삼악산 구름이 멋지다.
7. 삼악산 중턱에 걸친 구름은 시시각각 모양을 바꾼다.
8. 춘클릿지 주위도 구름이 오락가락. 3 피치에서 손정준 선생을 만났다.
9. 세 번째 마디 정상에서 바라본 춘클의 하일라이트 4 피치. 전반적으로 페이스.
10. 손 선생 부부가 자일파티를 이뤄 4 피치를 등반하고 있다.
11. 정신이도 힘차게 4 피치를 출발한다.
12. 먼저 오른 손 선생이 선등 중인 정신이를 촬영한다.
13. 손 선생님이 촬영해준 네 번째 마디 정상에서의 기념사진.
14. 여섯 번째 마디를 등반 중인 정신. 피치가 거듭될수록 등반이 즐겁다.
15. 춘클 6 피치에 있는 석문.
16. 정상의 멋진 소나무. 우리들의 등반도 이 소나무처럼 항상 푸르고 싱싱했으면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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