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벨소리에 잠을 깬다. 알람 소리가 아닌 전화벨 소리다. 시간은 새벽 5시 20분이다. 5시에 만나기로 한 은경이로부터 온 전화 소리이다. 20분 후에 만나자 하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간밤에 짐은 모두 챙겨놓은 상태라서 금방 나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알람 시간을 오후 4시 25분으로 지정해 놓은 실수를 했던 것이다. 내게는 아주 드문 일이 발생했는데도 덤덤한 걸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먹긴 먹은 모양이다. 어찌됐든 5시 35분 쯤에 은경이를 태우고 설악으로 향한다.
정신이가 이끄는 산악회 멤버들은 간밤에 서울을 출발하여 옥류탕 부근의 민박집에서 일박했다고 하니 산에서 만날 것 같은 예감이다. 한계삼거리를 지나 장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간에 한계산성 방향으로 올라가고 있는 정신이네 일행을 본다. 우리는 장수대 주차장에 주차하고 몽유도원도 릿지 초입으로 들어선다. 등산학교를 나와 처음으로 설악에서 암벽등반을 즐긴 곳이 몽유도원도 릿지여서 더욱 각별한 곳이기도 하다. 그때는 아주 설레이는 마음으로 등반에 임했던 것 같다. 가을색이 완연했던 몽유도원도 일원의 풍경도 경이롭게 다가왔었다.
처음 대할 때의 설레임은 없어졌지만 몽유도원도 릿지를 여유롭게 등반하면서 즐기는 것 또한 편하고 좋았다. 은경이의 선등으로 시종일관 차분하게 진행된 우리의 등반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우측으로 우람한 미륵장군봉 절벽에 매달린 클라이머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몽유도원도 릿지에서는 여름에 다녀온 코락길 루트 전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측으로는 한계산성 릿지의 깍아지른 절벽미를 등반내내 감상할 수 있다. 가을 바람 살랑대는 시원한 날씨는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등반로 주변엔 구절초, 벌개미취 등의 가을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가끔씩 보이는 산양똥과 바위 사이를 기어나가는 뱀의 모습에 잠시 긴장하기도 하지만 등반의 즐거움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다. 시루떡바위 옆의 마지막 피치를 안전하게 마치고 시간을 확인한다. 막 12시가 지난 시각이다. 8시 정도에 어프로치를 시작하여 쉬엄쉬엄 여유부리며 올랐는데도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간단한 점심 식사 후 장비를 꾸리고 한계산성 릿지와 연결되는 능선을 향해서 오른다.
길이 확실하지 않은 바윗길을 오르는 것이 등반하는 것보다 오히려 힘겹다. 근사하게 만들어진 말벌집 주위에서 길을 헤매기도 하고, 없는 길을 개척해 나가기도 하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고생하다가 안산과 서북주릉이 선명하게 보이는 한계산성과 만나는 능선 정상에 도착한다. 정신이네 일행과 통화가 되지 않아 우리끼리 길을 찾아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서북릉 방향으로 이어진 산성길을 조금 오르다 보니 좌측으로 내려서는 등산로가 보인다. 제법 선명한 길이어서 안심하고 천천히 하산길을 잡는다. 최근에 내려간 사람 발자국을 보면서 내려오다가 정신이네 일행을 만난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다. 인적이 드문 설악산 골짜기에서 친구들과 산악회 사람들을 만나니 더욱 반갑다. 중학교 동창들인 옥선이와 복순이도 함께하고 에코와 다도연가산악회 회원들을 포함한 무리가 일곱 명이다. 이제는 우리도 한 팀이 되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서 산을 내려가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계곡에서 탁족도 하고 설악의 살아 숨쉬는 자연도 만끽하면서 산을 나선다. 폐부 깊숙히 설악의 신선함을 마음껏 들이마신 초가을의 시원한 등반과 워킹 산행이 더 없이 즐거웠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바쁜 일상 속에서도 등반을 위한 운동을 계속 했었다. 그리 특별할 것은 없지만 퇴근 후 집에서 스트레칭과 팔굽혀펴기, 헬스싸이클, 턱걸이 등을 한 시간 남짓 꾸준히 해왔다. 등반을 더욱 안전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좀 더 몸이 가볍고 튼튼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목적을 가지고 하다보니 운동이 지겹지 않았다. 그리고 실전에서 그 운동의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바위를 잡는 손과 팔에 자신감이 실리는 것 같아서 등반이 한결 여유롭고 즐거웠던 것이다.
1. 몽유도원도 릿지 끝지점에 자리한 시루떡바위. 몽유도원도 바윗길의 트레이드 마크.
2. 최대한 등반을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짐을 가볍게 하고 튜닝된 어택용 배낭인 페츨 버그를 준비했다.
DSLR 카메라도 생략하고 모든 사진은 폰카로 찍기로 했다.
3. 몽유도원도 1피치 사선크랙. 고정되어 있는 캠에서 퀵도르를 빼내는 데 애를 먹었다.
4. 2 피치 출발지점. 좌측 뒤로 보이는 절벽은 한계산성 릿지.
5. 자일 하강 후 다시 올라야 하는 3 피치. 첫 볼트 직후가 약간 어렵다.
6. 진행방향 우측으로는 미륵장군봉 클라이머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7. 몽유도원도 릿지는 15 미터 미만 길이로 세 번 자일 하강하는 구간이 있다.
8. 하강 준비 중에 한계산성 직벽을 배경으로. 페츨 버그는 자일 착용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서 좋다.
9. 우측으로는 지난 여름에 등반했던 미륵장군봉 코락길 루트 전경이 잘 보인다.
10. 벌개미취를 비롯한 가을 들꽃이 등반로 주변에 지천으로 피었다.
11. 몽유도원도 릿지 후반부 전경.
12. 시루떡바위 옆에 자리한 릿지 등반의 라스트 피치 구간.
13. 어느덧 미륵장군봉이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한계령은 구름 속이다.
14. 등반을 마치고 희미한 길을 따라 능선을 오르다가 내려다본 풍경. 한계령으로 향하는 도로와 계곡, 하늘벽이 보인다.
15. 릿지 등반 종착점에서 바라본 시루떡바위 정상부. 아래서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형상.
16. 페츨 버그는 18 리터로 작은 용량이지만 당일 등반용으로 충분한 것 같다.
17. 몽유도원도 능선 끝자락에서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18. 능선 정상부에서 보이는 안산과 서북주릉. 어느새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듯 하다.
19. 매일 매일 꾸준한 운동 덕택에 한결 가볍고 여유로운 등반을 즐겼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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