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하루종일 대지를 촉촉히 적시던 날씨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겄다"라는 싯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학생들의 중간고사 기간이라 평일인 목요일인데도 잠깐 짬을 낼 수 있다. 연초록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는 산하를 생각하니 비 개인 날의 산행을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 업무 상의 일정을 잠깐 미루더라도 다시 오지 않을 날씨를 즐겨야 한다. 하늘의 날씨에 나의 일정을 맞춰야 한다. 나의 산행 일정을 위해서 하늘의 일기를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한강기맥 중에서 익숙한 구간을 걷고 싶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서 중앙선 전철을 타고 양평에 도착하니 아침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다. 역 앞의 택시로 농다치고개에 이른다. 택시비는 만육천원,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중미산과 유명산 언저리를 산행하던 젊은 시절에 자주 지나던 곳이다. 벌써 2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얘기다. 농다치고개는 한강기맥의 마지막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유명산에서 소구니산을 거쳐 내려오다 청계산 방향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위치한다.
농다치고개에서 청계산까지는 이정표 상으로 7.5 킬로미터 거리이다. 한화리조트를 왼쪽에 두고 진행하는 산길은 걷기 좋은 흙길이다. 새롭게 돋아나는 연초록 나뭇잎은 꽃보다 아름답다. 산길 좌우로 땅을 뚫고 스프링처럼 솟아나는 새싹들은 봄이란 계절을 온봄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밤의 비바람에 꽃잎이 많이 떨어진 진달래와 산벚꽃은 여전히 화려하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던 나무들이 파스텔톤의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숲은 한결 풍성해지고 이 풍성함을 담아낸 남한강 물줄기는 푸른 숲을 닮아 청아한 빛을 발하고 있다.
길가에 나즈막히 피어난 야생화가 앙증맞다. 보랏빛 제비꽃, 하얀 남산제비, 노랑제비, 각시붓꽃, 피나물꽃, 산괴불주머니, 개별꽃 등과 얘기하며 걷는 산길이 외롭지 않다. 옥산과 말머리봉을 거쳐 청계산으로 향하는 능선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마루금 산길이다.
청계산 정상 직전에서 된비알이 연속되기는 하지만 무난하게 오른다.
청계산 정상의 조망은 봄날답지 않게 선명하다. 여주와 양평을 거쳐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가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만나는 모습이 또렷하다. 뾰족한 백운봉에서 레이더 기지가 있는 용문산까지의 하늘금이 선명하고, 유명산 정상의 평원과 중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잘 보인다. 산행 초입이었던 농다치고개 다음에 나타나는 선어치고개에서 중미산, 삼태봉, 통방산을 거쳐 화야산 줄기로 이어지는 마루금도 언젠가는 가볼 곳이란 생각에 한동안 시선을 머물게 한다.
청계산에서 벚고개까지의 산길엔 유난히 예쁜 산벚꽃 나무들이 많아서 좋다. 동물이동통로 위로 진행할 수 있는 벚고개를 지나 갑산공원으로 향한다. 여전히 산길은 부드러운 흙길의 연속이다. 중간 중간 시야가 열리는 곳에서 바라보는 한강기맥의 꼬리 부분은 정확히 두물머리를 향하고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 사이를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것이 한강기맥이란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갑산공원묘지엔 인기 연예인이었던 최진실과 최진영 남매의 산소가 등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젊은 나이에 소중한 생명을 버려야 했던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기리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산소엔 화려한 꽃다발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쌓여있다.
갑산공원묘지에서 양수역까지는 전형적인 마을 뒷산길 모습이다. 벨지움에서 숲속을 산책하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로 오솔길은 평탄하고 숲은 풍성하다. 하지만 긴 시간을 걸어온 산객에게 4 킬로미터 남짓한 산길이 마냥 즐거운 것 만은 아니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느끼면서 어서 빨리 전철역에 도착했으면 하는 바램이 앞선다. 그렇게 지친 발걸음을 무심결에 옮기다보니 어느새 양수역에 도착한다.
전철 노선으로는 양평역에서 시작하여 오빈, 아신, 국수, 신원, 양수역에 이르는 길을 되짚어 온 셈이니 꽤 먼 길을 걸었다. 도상 거리로는 20 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열 시간 가까이 쉬엄쉬엄 걸었다. 연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숲의 향연과 함께 스프링처럼 돋아나는 작은 새생명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하루 온종일을 완전하게 만끽하면서 봄의 숲속에 안길 수 있었다는 사실과 그 좋은 숲길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 산길을 걷는 내내 산은 봄의 꿈틀거림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2. 농다치고개에 설치되어 있는 표지판... 한강기맥에 대한 설명이 멋지다..
3. 농다치고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장승이 재밌다... 아마도 한화리조트의 산책길이라서 설치된 듯한 인상..
4. 한강기맥의 표지판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5. 처음으로 올라본 옥산 정상에서의 인증샷... 주홍색 점퍼가 낯설긴 한데... 에어쉘이라는 소재의 기능과 착용감은 최고..
6. 말머리봉 정상의 표지판..
7. 청계산 정상 직전에서 뒤돌아본 중미산... 새벽까지 내린 비바람으로 진달래 꽃잎은 많이 떨어졌다..
8. 올봄에만 벌써 두 번째로 찾은 청계산 정상..
9. 여주에서 흘러내려온 남한강이 양평을 지나고 있다... 청계산 정상 조망..
10. 청계산 정상에서 바라본 양수리 방향의 조망..
11. 청계산 정상에서 중미산과 유명산을 바라보고..
12. 중미산에서 이어진 산줄기는 삼태봉, 통방산을 지나 화야산으로 이어진다... 언젠가는...
13. 스프링처럼 솟아나는 새생명들...
14. 인공적인 벚꽃의 화려함도 좋지만... 자연에 동화되어 있는 산벚꽃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
15. 벚고개의 동물이동통로 위에서 도로를 내려다 보니...
16. 갑산 가는 길의 한 봉우리 정상의 수수한 모습..
17. 파스텔톤의 수채화 느낌을 제대로 발하고 있는 숲..
18. 갑산공원묘지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 등로 주변엔 최진실 묘역이 있다..
19. 지친 발걸음 때문인지... 생각보다 길게 남은 거리가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20. 양수역이 보인다...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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