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나의 독서 양상은 여느 해와 다르다. 보통 가을이면 다른 계절보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이번 가을엔 강의가 없어 책 읽을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았는데 결과적으론 그렇지 못했다.
여름부터 빠져들기 시작한 암벽 등반의 영향이 크겠지만, 책과 멀어진 건 분명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여러 권의 산서를 조금씩 천천히 읽는 습관 때문에 내 책상 위에는 항상 서 너 권의 산서들이 놓여있다.
요즘엔 <한국 바위 열전>, <위험의 저편에>, <최초의 8000 미터 안나푸르나>, <텐징 노르가이> 등이 책상 위에서 뒹군다.
이 책들을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손에 잡히는대로 읽다가 빠져들면 끝까지 읽을 뿐이다.
한데 읽겠다고 사 놓은 책들을 제쳐두고 끝까지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알프스에서 온 엽서>이다.
저자인 허긍열 선생으로부터 <알프스에서 온 엽서>를 선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렵게 출판한 책을 공짜로 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두 권을 한국산악회에 주문하여 같이 등반하는 두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자비로 사서 읽은 후 저자의 친필 사인을 받은 <몽블랑 익스프레스>처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아쉽다.
<알프스에서 온 엽서>는 저자가 알파인 등반의 메카인 프랑스 샤모니에서 지낸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이다.
샤모니에 머문 초창기 3 년 동안 생활했던 얘기를 일상 생활의 자잘한 것부터
알프스 트레킹과 암빙벽 전문 등반에 이르기까지 솔직 담백하게 서술한 정감있는 수필들을 모아 놓았다.
한 편 한 편의 글이 한국에 있는 그리운 친구나 알프스를 동경하는 산우들에게 띄우는 엽서를 읽는 것 같이 포근하다.
저자가 전문사진가 못지 않은 실력으로 직접 등반하면서 담아낸 알프스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기념품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그림엽서의 풍경보다 더욱 값지다.
다소 정적인 알프스의 풍광 속에 동적인 산양이나 마모트가 함께 하면 더욱 빛나고 멋진 그림이 되듯
의미 있는 글과 사진이 함께 조화를 이루니 서로가 더욱 빛나고 생명력 있는 느낌이다.
지난 주 출장 차 대전을 오갈 때와 엊그제 문상 차 고향인 나주에 다녀올 때 <알프스에서 온 엽서>는 나의 훌륭한 길동무였다.
역설적이지만 이국의 알프스를 그리워하며 책을 읽는 동안 가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우리 나라의 산하는 더욱 사랑스러웠다.
책 속에서 저자가 샤모니에서 생활했던 그 시기에 나도 가족과 떨어져 유럽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조금은 외롭고 힘든 시기였지만 내 인생에 큰 이정표가 되었던 그 때를 회상할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지난 유월 샤모니 주변 알프스를 홀로 자유롭게 트레킹 하던 그 때가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 같은 달콤한 상상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책들이 순수한 등반 행위마저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여 기획 출판과 대필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알프스의 푸른 초원과 하얀 설원처럼 때묻지 않은 깨끗함을 간직한 좋은 책 <알프스에서 온 엽서>를 곁에 둘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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