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바쁘다는 핑계로 그간 교양 서적을 접하지 못했다. 요 며칠 동안은 2010년 나의 연구년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학교의 연구실에서만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했다.
우선 노트북을 하나 구입했다. 연구실에서 사용하던 컴퓨터와 동일한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연구에 사용하는 프로그램들과 자료들이 방대하다 보니 노트북에 옮기는 데 삼일 이상이 소요되었다.
이제는 노트북 들고 다니면서 세계 어디서든 연구할 수 있는 체제는 얼추 갖추었다.
오늘 오전엔 집에 있는 내 방을 재택근무 환경으로 바꾸고 정리정돈을 마쳤다. 이제야 비로소 주변 정리가 좀 된 것 같다.
정리된 내 방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와 한 달 전에 사 둔 <엄홍길의 약속>을 읽은 것이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영어로 성경책을 읽는 것이 버릇처럼 자리 잡았다. 올해는 약식으로 한글로 된 <야고보서>를 읽었다.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 말씀은 내게 많은 자극을 준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하라는 말씀, 사람의 혀를 큰 배의 키와 나무를 태우는 불에 비유한 대목,
고난 당하면 기도할 것이며 즐거울 때는 찬송하라는 말씀 등이 오늘 새롭게 다가온다.
선생으로서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내게는 항상 교훈을 주고 반성하게 만드는 야고보서이다.
짧은 서신인 야고보서이지만 성경을 읽고나니 늦게나마 2010년 한 해를 비로소 시작한다는 마음 자세가 된다.
목디스크로 뻐근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한의원에 다녀온 오후부터 <엄홍길의 약속>을 읽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 시간이 아까울만큼 단숨에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준호, 박무택, 장민 세 사람은 2004년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이었다.
박무택과 장민이 정상을 밟고 난 후 하산하다 8700 미터 부근에서 조난을 당한다.
백준호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둘을 구하러 가지만 끝내 세 사람 모두 돌아오지 못한다.
다음 날 등반 중이던 오은선에 의해서 박무택이 자일에 매달린채 죽어 있는 사진이 세상에 알려진다.
박무택과 친형제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던 엄홍길은 이 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할 계획으로 원정대를 조직한다.
원정대의 이름은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고산 구조 원정대가 구성된 것이다.
초모랑마는 티벳에서 부르는 에베레스트의 다른 이름이고, 이 북쪽의 티벳 루트를 등반하다 조난사고가 났던 것이다.
<엄홍길의 약속>은 18명의 원정대원 중 한 명으로 참가했던 작가 심산의 글이다.
원정단장은 고인경 파고다어학원회장, 원정대장은 손칠규, 등반대장은 엄홍길이 각각 맡았다.
원정대의 목적이 정상 등정에 있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념 자체가 다른 원정대였다.
이 책은 원정대의 세부적 일정을 다루기 보다는 휴먼원정대란 말에 걸맞게 사람들 간의 감동적 이야기를 적고 있다.
출국하기 전 엄홍길과 심산은 백준호, 박무택, 장민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여 가족들께 인사한다.
그들의 어머니와 미망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어서 근래에 드물게 눈물을 많이 흘렸다.
얼음덩이로 변해있던 박무택의 시신은 정상 직전의 등로에서 매우 어렵게 수습된다.
하산시키기 불가능한 상황 때문에 정상 가까운 양지바른 테라스에서 돌무덤으로 박무택은 안장된다.
백준호와 장민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고 위령제로 대신한다.
이렇게 줄거리만을 얘기하면 휴먼원정대 자체의 여정이나 등반 기록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심산의 글을 보면 휴먼원정대 자체가 또 하나의 훌륭한 등반 과정을 이룩했고,
이들이 보여준 등반의 행태가 매우 독창적이고 도전적이며 감동적인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상 등정에 목적을 두지 않는 산행도 충분히 가치있고 감동적일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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