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초순에 딸이 결혼함으로써 나는 명색이 여섯 명으로 구성된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요즘 시대에 가장의 권위 같은 건 퇴색된 지 오래라고 하지만, 가족 구성원 간에 사랑이 흘러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가꿔 나가고 싶은 소망마저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마저 얼굴 마주할 기회가 드물다면 행복한 가정은 요원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우리 부부가 함께 떠나는 첫 번째 가족여행을 계획한다.
숙소는 고급 호텔처럼 새롭게 단장되었다는 만리포연수원으로 정했다. 2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현 직장의 연수원이지만 이번이 첫 방문이다. 처음으로 방문한 연수원 시설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지난 주에 열린 개교기념일 행사에서 20주년 장기근속 공로패를 받으면서 바람처럼 빠르게 흘러간 세월을 실감해야 했다. 그런데 배정된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으로 펼쳐진 만리포 백사장과 서해바다의 절경을 대하는 순간, 또다시 2004년 3월에 부임한 후로 이 직장에서 보낸 짧지 않은 세월이 불현듯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잠시나마 감회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만리포에서의 약속 시간인 오후 3시에 맞춰 출발해도 되건만, 무엇보다 교통 정체가 싫은 우리 부부는 새벽 6시에 서울의 집을 나서서 숙소로 가는 길 중간에 서산과 태안의 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개심사,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는 태을암과 태안읍의 진산인 백화산을 구경하는 일정이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한 마애여래삼존상은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는 명성에 걸맞는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기쁨이 있었다. 개심사 경내는 공사중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고, 태안 마애여래삼존상은 서산의 그것에 비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초라했다. 태안읍과 서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백화산 정상과 구름다리는 기대 이상의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만리포에서의 가족모임은 연수원에 체크인 한 후, 다같이 백사장을 산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여섯 명 모두가 함께 드넓은 백사장을 거닐면서 작은 조개와 게를 비롯한 바다생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남달랐다. 횟집에서의 만찬은 풍성했고, 숙소에서 놀이삼아 벌인 가족 전용 게임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규칙도 잘 모르는 사위와 딸 부부가 일등을 차지하여 한바탕 웃울 수 있었다. 모두들 쾌적한 숙소 시설 덕택에 만족스런 하룻밤을 보낸 후, 태안 둘레길인 해안길과 멋진 암벽이 펼쳐진 갯바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바닷가의 신선한 아침 풍경을 즐겼다. 은행에 다니는 아들의 대출 고객인 사장님이 운영한다는 브런치 카페는 이번 가족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아들과 딸이 분가하여 어엿한 가정을 이룬 후에 처음으로 가진 청명한 가을날의 가족모임이 여러모로 즐겁고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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