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도와 석모도를 이어주는 연도교인 석모대교에 이르렀을 때 주위는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외포리 선착장을 통과하여 해무 가득한 석모대교 위에 올라섰으나,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석모도에 뿌리를 내린 다리의 끝지점은 희미한 소실점으로 뭉개져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공간이동 하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이었다. 불현듯 김승옥의 분위기 소설 <무진기행>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리마을 외곽의 공터에 주차하고 상주산 중턱에 자리한 암장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주변에서는 진달래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올 들어 처음 만나는 진달래꽃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무채색의 숲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참꽃의 화사한 분홍빛은 자신만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인공적인 원색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암장에 들어서는 길가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진달래꽃의 환대를 받았으니 등반 또한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번이 두 번째 방문인 상리암장은 한층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오전에는 1암장의 5개 루트에서 나, 성배, 은경, 이렇게 셋이서 차례대로 부지런히 암벽에 매달렸다. '강화도령(5.10a)', '처음이지(5.10a)', '긴한숨(5.10b)', '의지의 한국인(5.10b)', '청춘의 봄날(5.10b)' 루트를 연이어 등반했다. 늦은 점심 후에는 2암장의 '후아유(5.10b)', '이제서야(5.10b)', '청암인(5.10c)' 루트에서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열심히 오르내렸다. 세 악우들 모두가 안전하고 효율적인 등반시스템이 몸에 배어 있으니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등반이 이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등반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주위의 다른 팀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오후 5시 30분 즈음에 우리팀이 마지막으로 암장을 빠져 나왔다.
서해의 낙조가 서서히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무렵에 도착한 보문사 앞에서 봄이면 가끔 생각나는 맛깔스런 '밴댕이정식' 메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식후 산책으로 볼거리 많은 보문사 경내를 구경했다.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저녁 시간의 보문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사의 이미지를 오롯히 간직하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길로 이어진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까지 다녀온 우리들의 등산 같은 산책길에는 보름을 하루 앞 두고 차오를 대로 차오른 둥근 달과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함께 했다. 봄날 저녁의 몽환적인 낭만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벼운 봄나들이 등반지로 상리암장을 선택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이렇듯 완벽한 봄날 하루를 선물로 받을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대목이다. 우수와 경칩은 이미 한참 지났고, 지난 수요일이 춘분이었건만, 그 동안의 변덕스럽고 쌀쌀한 일기 탓에 올해의 봄은 유난히 더디게 온다는 인상이었다. '봄'을 동사인 '보다'의 명사형으로 여긴다면, 오늘에서야 비로소 석모도에서 온전한 봄을 맞이한 셈이다. 내게는 오늘부터가 진짜 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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