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강화 석모도 상리암장 - 2024년 3월 23일(토)

빌레이 2024. 3. 24. 11:39

아침 7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도와 석모도를 이어주는 연도교인 석모대교에 이르렀을 때 주위는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외포리 선착장을 통과하여 해무 가득한 석모대교 위에 올라섰으나,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석모도에 뿌리를 내린 다리의 끝지점은 희미한 소실점으로 뭉개져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공간이동 하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이었다. 불현듯 김승옥의 분위기 소설 <무진기행>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리마을 외곽의 공터에 주차하고 상주산 중턱에 자리한 암장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주변에서는 진달래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올 들어 처음 만나는 진달래꽃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무채색의 숲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참꽃의 화사한 분홍빛은 자신만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인공적인 원색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암장에 들어서는 길가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진달래꽃의 환대를 받았으니 등반 또한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번이 두 번째 방문인 상리암장은 한층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오전에는 1암장의 5개 루트에서 나, 성배, 은경, 이렇게 셋이서 차례대로 부지런히 암벽에 매달렸다. '강화도령(5.10a)', '처음이지(5.10a)', '긴한숨(5.10b)', '의지의 한국인(5.10b)', '청춘의 봄날(5.10b)' 루트를 연이어 등반했다. 늦은 점심 후에는 2암장의 '후아유(5.10b)', '이제서야(5.10b)', '청암인(5.10c)' 루트에서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열심히 오르내렸다. 세 악우들 모두가 안전하고 효율적인 등반시스템이 몸에 배어 있으니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등반이 이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등반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주위의 다른 팀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오후 5시 30분 즈음에 우리팀이 마지막으로 암장을 빠져 나왔다.       

 

서해의 낙조가 서서히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무렵에 도착한 보문사 앞에서 봄이면 가끔 생각나는 맛깔스런 '밴댕이정식' 메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식후 산책으로 볼거리 많은 보문사 경내를 구경했다.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저녁 시간의 보문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사의 이미지를 오롯히 간직하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길로 이어진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까지 다녀온 우리들의 등산 같은 산책길에는 보름을 하루 앞 두고 차오를 대로 차오른 둥근 달과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함께 했다. 봄날 저녁의 몽환적인 낭만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벼운 봄나들이 등반지로 상리암장을 선택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이렇듯 완벽한 봄날 하루를 선물로 받을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대목이다. 우수와 경칩은 이미 한참 지났고, 지난 수요일이 춘분이었건만, 그 동안의 변덕스럽고 쌀쌀한 일기 탓에 올해의 봄은 유난히 더디게 온다는 인상이었다. '봄'을 동사인 '보다'의 명사형으로 여긴다면, 오늘에서야 비로소 석모도에서 온전한 봄을 맞이한 셈이다. 내게는 오늘부터가 진짜 봄인 것이다.

 

▲ 상리암장으로 오르는 오솔길가에서 화사한 진달래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침안개가 자욱하여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첫 루트로 '강화도령(5.10a)'을 선택했다. 우리가 등반을 시작할 때부터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날씨는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 자연바위에서는 항상 첫 번째 등반이 어렵고 긴장된다. 슬랩등반인 경우는 특별히 암벽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 오전엔 1암장에서 등반했다. 우리팀 외에도 서너 팀이 더 있었으나 암장이 넓어서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 두 번째 루트로 '처음이지(5.10a)'를 등반하고 있다.
▲ 등반 초반엔 좋은 홀드만을 찾느라 하이스텝도 많이 하고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 두 번째 루트인 '처음이지(5.10a)'까지는 누룽지 슬랩에 대한 적응이 덜 된 듯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올랐다.
▲ 세 번째로 오른 '긴한숨(5.10b)' 루트부터는 몸이 풀리고 어느 정도 바위에 적응한 느낌이어서 그랬는지 온사이트임에도 불구하고 난이도 낮은 이전 두 루트보다 오히려 쉽게 완등할 수 있었다.
▲ '의지의 한국인(5.10b)' 루트는 인수봉 '취나드B' 코스의 사선 크랙을 닮은 바위가 인상적이었다.
▲ 상리암장이 처음인 성배씨는 모든 루트가 특색 있고 재미 있다면서 넘치는 만족감을 표시했다.
▲ 성배씨가 톱앵커에서 뒤돌아 서서 보이는 풍경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 톱앵커에서 뒤돌아 보면 펼쳐지는 시원스런 풍광이다. 해무가 옅어지고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 점심 전 마지막으로 오른 '청춘의 봄날(5.10b)' 루트에서 처음으로 추락했다. 둘째 볼트 우측의 패인 부분이 홀드일 듯하여 그쪽으로 진행했는데 물길이라서 그랬는지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루트 파인딩을 잘못한 결과였다. 성배씨의 안전한 빌레이로 스크래치 상처 하나 없이 오히려 개운한 추락을 맛볼 수 있었다.
▲ '청춘의 봄날' 루트의 상단부를 등반 중이다. 추락했던 둘째 볼트(사진 중앙부 하단)에서는 우측이 아닌 좌측 사선 크랙이 더 좋은 선택지였다. 왼손 홀드가 듬직해서 그리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었다.
▲ 후등으로 오른 은경이와 성배씨도 '청춘의 봄날' 크럭스 부분을 좌측과 우측 모두 경험해 보았다.
▲ 따스한 봄볕이 아낌 없이 쏟아지는 베이스캠프에서의 점심시간이 한없이 여유로웠다.
▲ 베이스캠프에서는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 점심 직후엔 기온이 섭씨 15도 이상으로 오르고 햇살이 따가워서 조끼를 벗고 썬글라스를 착용하고 등반에 나섰다.
▲ 늦은 점심 후에는 베이스캠프 앞의 2암장에서 놀았다. '후아유(5.10b)' 루트부터 줄을 걸었다.
▲ 2암장의 루트들은 1암장과는 또다른 특색이 있었다. 중반부까지는 가로 크랙이 이어지고 상단부는 대부분이 짭짤한 슬랩 구간이다.
▲ 우측의 성배씨가 '후아유' 루트의 중반부 크럭스 구간을 잘 올라서고 있다.
▲ '이제서야(5.10b)' 루트를 등반 중이다.
▲ 은경이가 '이제서야' 루트의 초반부 크럭스를 잘 돌파하고 있는 중이다.
▲ 2암장 상단부의 페이스 구간을 오를 때에는 테스타로사 암벽화가 도움이 되었다.
▲ 3암장 앞에서 만개한 생강꽃도 만날 수 있었다.
▲ 등반을 마치고 하산할 때에는 오전과 달리 깨끗한 시야로 석모대교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 진달래꽃도 아침보다는 더욱 풍성해진 듯 보였다.
▲ 고요한 보문사 저녁 산책길에서는 봄밤의 정취에 한껏 취할 수 있었다. 달님과 별님이 동행하여 더욱 특별한 봄밤이었다.
▲ 성배씨가 촬영해 준 내 등반 모습 1.
▲ 성배씨가 촬영해 준 내 등반 모습 2.
▲ 성배씨가 촬영해 준 내 등반 모습 3.
▲ 새롭게 작성된 듯한 상리암장의 루트 안내표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