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컵 축구 경기의 열기가 뜨거운 요즘이다. 토너먼트 첫 경기였던 사우디와의 16강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조규성 선수의 천금 같은 동점골 덕택에 연장까지 이어진 혈투에도 불구하고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승부차기에서는 조현우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에 힘입어 4:2 승리를 따냈다. 심야에 펼쳐졌던 그 경기를 끝까지 관전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다. 간밤에 호주와 격돌한 8강전 역시 사우디전 못지 않은 매우 드라마틱한 경기였다. 이번엔 답답한 마음을 참으면서 끝까지 TV를 시청한 보람이 있었다.
호주전 경기의 킥오프 시간은 0시 30분이었다. 1대 0으로 패색이 짙던 후반 추가시간에 손흥민 선수가 얻어낸 PK를 황희찬 선수가 시원한 동점골로 성공시켜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갔다. 연장전 전반 막바지엔 황희찬 선수가 얻은 프리킥 찬스를 손흥민 선수가 그림 같은 결승골로 연결시켰다. 매스컴에서는 이렇게 극적인 승부를 연속적으로 펼치는 우리 대표팀 경기를 "좀비 축구"라 명명했고, 클린스만 감독은 축구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이 틀림없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심야의 명승부를 끝까지 지켜보느라 새벽 3시 반 경에 잠을 청했으나, 자는 둥 마는 둥이었다. 약간은 몽롱한 상태로 아침에 일어난 나도 좀비가 된 듯했다.
평소의 등반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은 시각인 오전 11시에 당고개역에서 성배씨와 준수씨를 만났다. 곧장 눈앞으로 올려다 보이는 불암산의 산머루산다래 암장으로 향했다. 베이스캠프 주변엔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기온은 영상이어서 슬랩 등반을 연습하기엔 그런대로 괜찮았다. 처음 선등할 때는 바위 표면이 차가운 탓에 손끝에 힘을 주지 못하여 손이 미끌려서 살짝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암벽화 바닥에 힘이 실린 발은 전혀 미끌리지 않았다. 슬랩을 몇 차례씩 오르내린 후, 지근 거리에 위치한 실버암장으로 이동했다.
처음으로 접한 실버 암장의 벽은 다소 위압적이었다. 정면 벽은 하드프리 등반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6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제법 드넓은 슬랩 루트들이 펼쳐져 있었다. 전반적인 암장의 모양새가 양주 불곡산 독립봉 암장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향의 음지여서 추운 겨울에 등반하기엔 적절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래도 구경만 하고 갈 수는 없어서 가장 쉬운 루트인 '실버의 혼(5.10a)'에 붙어 보았다. 내심 온사이트 완등을 바랬으나 완등은 고사하고, 수 차례의 행도깅(hangdogging) 끝에 가까스로 줄을 걸 수 있었다. 잠이 부족한 몸이 무겁기도 했지만, 낯선 바위가 주는 이질감과 크랙을 따라 사선으로 이어진 등반선이 추락의 공포로 다가왔던 것이다. 캠을 준비해 왔더라면 한결 더 안정적으로 등반했을 것이란 교훈을 새긴 순간이었다.
앵커에 로프를 설치한 후에는 톱로핑 상태에서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등반했다. 두 번째로 붙었을 때 '실버의 혼'을 톱로핑으로 완등한 후에야 비로소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자연 암벽에서는 온사이트 리드 등반과 톱로핑 재등의 차이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한 순간이었다. 바로 옆의 '비상(5.11c)' 루트는 톱로핑으로 붙었는데도 초반부 페이스와 핑거크랙 구간을 볼트따기로 돌파할 수 밖에 없었다. 산머루산다래 암장 반대 방향의 하산길 중간에서는 개척된 지 얼마 안 된 듯 보이는 거봉 암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거봉 암장은 슬랩 루트가 대부분이었다. 막상 붙어보지 않고는 바윗길을 평가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게는 마구 등반하고 싶게 구미가 당기는 암장은 아닌 듯한 첫 인상이었다.
심야의 축구 시청 여파로 자칫하면 허투루 보낼 뻔 했던 토요일 오후 시간을 매우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이 남은 하루였다. 수유역 주변에서 갖은 뒷풀이 시간엔 등반에 얽힌 세 남자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곤란은 극복하고 위험은 피하자"는 등반 철학을 상기하면서 항상 새로운 등반에 도전하는 자세를 견지할 수 있기를 서로가 응원했다. 등반 이외의 잡다한 일들이 얽혀 상호간의 "아름다운 거리"가 지켜지기 어려운 전통적인 산악회 문화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재미와 의미가 상존하는 클라이밍 활동에 집중하자는 동료의식이 우리들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등반하는 우리들 사이엔 이른바 'CSCC(Cool and Safe Climbing Crew)'를 지향하는 연대의식이 은연 중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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