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어보면 작가는 추상 수학의 개념이 머리 속에 제대로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대 수학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것인지도 모른다. 문과와 이과를 확연히 구분하여 결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영역처럼 만들어 놓은 한국의 현실이 나는 답답하다. 철학과 수학은 예전엔 구분이 없을 정도로 친밀한 학문인데 말이다.
헷세는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나 닥터지바고의 저자인 빠스쩨르나크는 추상 수학, 그 중에서도 대수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구체적인 부분을 지금 기억할 순 없지만 내가 수학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시절에 읽었던 그들의 작품 속에서 제대로 된 수학적 기틀을 보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한국 작가들은 실망만을 안겨줄 뿐이다.
실망을 안겨준 대표적인 작가는 조세희씨다. 80년대 초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연작 소설로 일약 스타가 된 사람이다. “난쏘공”이라 불리는 이 소설 속에는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라는 소제목의 작품들이 들어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앞뒤를 구별할 수 없는 스트립 정도로, 클라인의 병은 입구와 출구를 구별할 수 없는 병(bottle) 정도로 일반인들은 알고 있다.
이 두 제목을 소설화 하기 위해서 조세희씨는 수학책을 붙잡고 몇 달간 공부한 끝에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자부한 모양이다. 노력은 가상하였으나 내가 보기엔 위에서 말한 일반인들 수준 이상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의 병은 2차원 평면에서 동일화(isomorphism) 과정을 통해서 정의되어진다.
그러나 둘의 가장 큰 차이는 포함되는(imbeded)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뫼비우스 띠는 3차원에서 우리가 구현할 수 있지만, 클라인의 병은 3차원에서 구현할 수 없는 것임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세희씨는 클라인씨의 병도 3차원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의 병은 수학적으로 방향을 결정할 수 없는 구조체로서 좀 더 많은 기하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작가들은 특이한 것을 보거나 들으면 이것을 토대로 작품화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때는 그 것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문열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의 현학적인 표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내가 잘 모르는 중국 고전이나 서양의 고전 문학 작품 속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수준을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박경리씨는 어떠한가. 정말 작가 자신이 몸과 마음, 그리고 완벽한 철학적 성찰 후에 작품을 집필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한국의 정서를 가혹하리만치 정확히 그리고 치열하게 묘사한다. 토지, 파시,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등등의 명작에서 우리는 제대로된 작품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황석영씨나 송기숙씨 정도가 이에 근접한다고 생각된다.
박경리씨의 수준을 볼 수 있는 일화 하나. 예전에 박경리씨가 텔레비전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당시 한참 이슈가 되고있던 페미니즘 문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 페널의 질문에 대한 이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여권, 남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권이 있을 뿐이다.” 내공이 쌓이지 않고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비슷한 질문에 이문열씨는 뭐라고 주저리 주저리 답한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상당히 옹색한 답변이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탄탄한 기본 위에서 어떤 일을 헤쳐나갈 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도 눈앞의 실적만을 위해서 눈가리고 아웅한 적이 많았다는 것을 새삼 많이 느낀다. 이문열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는 조금 미련하게 살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내면의 만족감에 기초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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