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북부와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 비가 온다는 이른 아침의 일기예보가 라디오로부터 들린다. 물폭탄을 동반하고 북상 중인 제17호 태풍 타파의 영향이라고 한다. 어제도 하루종일 흐린 하늘이었지만 서울엔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다. 비슷한 날씨가 오늘도 지속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등반 장비를 꾸려서 집을 나선다. 수유역에서 8시에 택시를 타고 도선사에 도착한다. 택시의 창문으로 보이는 우이동 도선사 입구 일대는 강북구 산악축제를 준비하는 손길들로 분주한 모습들이다. 도선사에서 용암문으로 올라가는 산길에 접어든다. 다소 쌀쌀함이 느껴지는 신선한 숲속의 공기는 계절이 어느새 가을 문턱을 훌쩍 넘어섰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산행하기 가장 좋은 이 가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부지런히 등반에 임할 것을 내심 다짐해본다.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추석 전의 제13호 태풍 링링이 남긴 상처가 등산로 주변 곳곳에서 발견된다. 뿌리가 뽑히거나 줄기가 꺽여져 쓰러진 나무들이 보인다. 떨어진 나뭇잎과 잔가지들로 산길 주변이 어지럽다. 노적봉 암벽 가장자리를 우측 끝에서 좌측 끝의 편지길 초입까지 돌아나가는 동안 암벽 루트들을 차례로 구경한다. 코바위 아래의 반도길 출발점은 낙석 위험 때문에 등반을 금지한다는 푯말과 함께 바윗길 위에도 출입금지를 알리는 플라스틱 조각들을 설치해 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반도길을 당분간 오를 수 없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언짢은 기분이 스쳐간다. 평소의 주말과는 달리 노적봉 중앙벽에는 클라이머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좌측의 광클길을 등반하고 있는 한팀이 보일 뿐이다.
즐거운 편지길은 첫째와 둘째 피치만 잘 통과하면 그 이후는 부담감 없이 즐기면서 등반할 수 있는 바윗길이다. 긴 침니가 이어지는 첫째 피치는 스태밍 자세를 꾸준히 유지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피치는 사선으로 진행하는 밴드를 따라서 올라야 하는 구간으로 밸런스를 잡기가 만만치 않고 페이스 형태의 기울기도 가파른 편이다. 그나마 볼트 사이의 간격이 멀지 않다는 점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피치부터는 마찰력 좋은 밴드가 계단처럼 이어지고 조망이 트여서 등반이 즐겁다. 구름 낀 하늘에 햇빛은 보이지 않지만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아서 굽이쳐 흐르는 한강 하구의 물줄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주변에 우리팀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바윗길에서 편안한 등반을 즐겼다는 만족감을 안고 노적봉 정상에 도착한다. 위문 뒤로 인수봉 서면 벽에 개미처럼 붙어 있는 많은 클라이머들을 보면서 노적봉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가 떠오르는 편지길 등반을 회고하면서 제목에 '편지'가 들어간 많은 시들 중에서 오늘은 김남조 시인의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페이스에 사선 밴드를 따라서 올라가는 편지길 둘째 피치를 등반 중이다.
▲ 용암문에서 노적봉 암벽 가장자리를 돌고 돌아서 제법 긴 어프로치를 끝내고 편지길 초입에 도착한다.
▲ 대침니가 인상적인 편지길 첫째 피치 등반에 나서고 있다.
▲ 좌측 벽에 발을 올리고 우측 벽에 상체를 기대는 스태밍 동작으로 진행한다.
중간 볼트는 확보점 바로 아래에 하나가 있다. 그 전에 캠 하나를 치고 등반했다.
▲ 첫 피치 확보점에서 내려다본 침니의 모습이다.
▲ 둘째 피치는 직벽에 사선으로 뻗어있는 밴드를 타고 오르는 루트이다.
▲ 둘째 피치는 마찰력 좋은 밴드에 볼트 간격이 좁은 편이라서 균형만 잘 잡으면 괜찮다.
▲ 셋째 피치 초반부에 들어서고 있다.
▲ 셋째 피치부터는 힘쓸 일이 거의 없다.
▲ 서서히 전망이 트이기 시작한다. 흐린 하늘이지만 시야는 좋은 편이다.
▲ 루트 좌측으로 보이는 백운대 정상에도 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 원효봉과 염초봉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평야지대는 낮게 깔린 연무에 잠겼다.
▲ 셋째 피치 확보점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아름답고 시원스런 풍광을 즐기는 순간이 행복이다.
▲ 넷째 피치도 계속 이어지는 밴드를 따라서 오른다.
▲ 홀드가 많고 까다로운 동작을 취할 필요가 없는 구간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 쉬운 루트에서도 선등자는 침착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 다섯째 피치 초반부를 오르고 있다. 사진엔 보이지 않는 후반부의 슬랩에서 살짝 긴장해야 한다.
▲ 햇빛은 없어서 사진은 흐리지만 시야가 좋아서 국녕사 대불이 가까이 보이고 굽이치는 한강의 물줄기도 선명하다.
▲ 여섯째 피치는 날등으로 올라서기만 하면 나머지 구간은 쉬운 편이다.
▲ 여섯째 피치 중반부의 슬랩을 오르고 있다.
▲ 실질적인 등반이 종료되는 여섯째 마디 확보점에서 자일을 정리한다.
▲ 노적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릿지화로 올라도 충분한 구간이다.
▲ 노적봉 정상의 바윗틈으로 바라본 백운대의 모습이다.
▲ 위문 너머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인수봉에는 많은 클라이머들이 붙어있다.
▲ 노적봉 서봉 정상에서 본 동봉과 그 너머의 만경대 능선이 선명하다.
▲ 코바위 부근의 등반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다.
▲ 바윗길 출발점에도 출입금지 표시를 해두었다.
▲ 사진 우측의 코바위를 중앙벽에서 올려다보니 곧 쏟아질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 어프로치 중간에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을 심심찮게 보았다.
▲ 즐거운 편지길로 가는 중간에 보이는 바위에 인공등반을 연습할 수 있는 볼트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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