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등반가인 허선생님이 서울에 오셨다. 아주 드문 서울 나들이다. 해마다 한두 차례 내가 대구로 내려가서 허선생 부부와 등반이나 트레킹을 같이 하고 팔공산 무인산장에서 숙박도 하곤 했었다. 올 봄에도 허선생이 알프스로 떠나기 전 적절한 시기에 한번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허선생의 아내 되시는 장선생님의 서울 출장이 잡혔고 부부가 서울에 오게 되어 서로 얼굴을 마주 할 기회가 생겼다. 나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중간고사 기간이라 허선생님과 둘이서 담소 나누며 한적한 평일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주말이면 산객들로 붐비는 관악산과 삼성산에서 촉촉히 내리는 봄비 속에서도 발길 닿는 대로 여유롭게 산길을 걸었다.
사당역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했었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약속장소인 4번 출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허선생님이 먼저 나를 알아보셨다. 역 근처의 미니 커피숍에서 천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마시며 잠시 묵은 회포를 풀고 곧장 서울둘레길 5코스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서 걷는다. 오후엔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는 내심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산에 들고 보니 비가 와도 괜찮을 듯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낙성대 공원을 거쳐 서울대학교 정문 앞의 드넓은 관악산 진입로를 따라가다가 서울둘레길 이정표를 보고 우측길로 접어든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 때마침 나타난 팔각정에서 내리는 비를 감상하며 한가로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다시 삼성산 자락으로 연결되는 둘레길을 따라서 걷다가 칼바위 능선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루트를 따르기로 한다. 둘레길에서 연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한 숲속을 걷는 것 못지 않게 조망이 트이는 능선길의 시원함도 으뜸이다. 허선생님은 호압사가 내려다보이는 조망터에서 알프스로 떠나기 직전에 잠시 살았다는 마을이 보인다며 그때를 회상하는 듯했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산행을 이어가는 것도 별로 귀찮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풍광이 시원하다. 정상 능선 주위에서도 화사한 복사꽃 무리를 자주 만난 것 또한 여느 산과는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다. 삼막사에 들러 경내를 구경하고 마애불이 있는 칠성각 처마 밑에서 간식을 먹을 때부터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우리는 산사나이들 답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삼성산 정상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받쳐들고 산길을 걷는 것이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올라보는 삼성산 정상을 찍고 차분한 발걸음으로 서울대학교 캠퍼스 옆으로 난 계곡을 따라서 하산했다. 호수공원을 지나 관악산 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사당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갈무리 했다. 일곱 시간 동안 허선생님과 둘이서 정답게 관악산과 삼성산의 산길을 누비고 다녔다. 산과 산서로 닿은 인연이기에 산에서 만났을 때 더욱 할말이 많았던 오늘 우리들의 산행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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