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저녁부터 틈틈히 배낭에 짐을 꾸려본다. 조바심과 기대감으로 토요일에 있을 설악산 등반을 위한 준비를 일찍부터 서두른 것이다. 작년 8월의 석주길 등반 이후로 설악산에 가지 못했다. 설악에서의 암벽등반을 특별히 좋아하는 내가 1년 넘도록 그 산을 보지 못한 탓에 마음 속에는 진한 그리움이 쌓였다. 그리움은 가슴 설레임을 동반한다. 등반을 위한 장비들을 하나 하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평소와는 다른 설레임이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순수함이 줄어든 때문인지 설레임이란 감정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설악산 등반을 준비하는 동안 나에게 찾아든 이 설레임은 기분 좋고 소중한 가슴 떨림이다. 배낭을 꾸리는 순간부터 이미 설악산 등반은 마음 속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설악산은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다. 설악의 숨겨진 속살을 보고 느끼면서 그 품에 오롯히 안기고 싶은 마음이 오래 전부터 강했었다. 이는 내가 암벽 등반을 배워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러한 내가 어떤 이유로든 설악에 가지 못하고 암벽등반하기 좋은 계절인 작년 가을과 올해의 봄을 넘겼다는 건 뭔가 내 삶이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어쨌든 이 가을엔 설악산 등반을 다녀와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에 6피치까지만 등반하고 1봉 정상에서 허공다리골로 내려왔던 토왕골의 경원대길 루트를 끝까지 등반해보고 싶었다.
토요일 새벽 4시경에 서울을 빠져 나간다. 6시가 막 지난 시각에 미시령 터널을 빠져나와서 학사평의 순두부집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어프로치를 시작하여 토왕골에 들어선다. 비룡폭포 위를 지나 굽어보는 토왕골은 여전히 신선들이 노니는 세상인 것처럼 아름답다. 미세먼지 농도가 제로에 가깝다는 요즈음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마주보며 빛나고 있는 토왕성 폭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보인다. 토왕골 좌우의 깍아지른 절벽들은 하나같이 클라이머들의 수직본능을 일깨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허공다리골과 토왕골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을 지나서 손쉽게 경원대길 초입을 발견한다. 바위에 푸른색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써놓은 까닭이다. 루트에 쉽게 진입한 건 좋은데 자연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과한 표시라는 생각이 든다.
첫 피치 20미터는 자일을 설치하지 않고 올라가서 둘째 피치부터 장비를 착용하고 본격적인 등반에 나선다. 2피치와 3피치는 어렵지 않아서 중간에 피치를 나누지 않고 60미터를 단번에 오른다. 4피치는 직벽에 세로로 길게 뻗어내린 직상 크랙을 따라 오르다가 후반부에서 우측 사선으로 진행하여 오버행을 넘어서는 구간으로 등반 거리는 40미터에 이른다. 여기부터는 살짝 긴장하게 되고 등반하는 재미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5피치는 4피치 확보점에서 우측의 침니를 올라서서 세로 크랙을 따라 직상하다가 후반부에 약간의 오버행 구간을 넘어서는 구간이다. 예전에는 돌출되어 있는 암각에 슬링이 걸려 있어서 쉽게 확보점을 찾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슬링이 보이지 않는다. 준비해간 슬링으로 확보점을 만들고 비로소 열리는 시원한 토왕폭 풍경을 감상하면서 후등자를 확보하는 기분이 상쾌하다.
개념도 상에 가장 어려운 구간으로 나와있는 4피치와 5피치의 난이도는 5.9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피치를 끝내고 비교적 쉬운 6피치를 올라서면 경원대길 릿지의 첫째 봉우리인 1봉에 도착한다. 친구들과 3년 전에 처음 경원대길을 찾았을 때의 내 몸은 발목수술을 받은 후에 재활 중인 상태였다. 한동안 등반을 못했던 그때의 몸상태에서 후등으로 6피치까지 오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웠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엔 선등으로 올랐는데도 별다른 긴장감 없이 즐겁게 오를 수 있었다. 그동안 실내암장에서 꾸준히 운동하고 노력했던 순간들에 대한 보상을 받은 듯한 만족감이 크게 느껴진다. 1봉에서 잠시 동안의 휴식을 즐기고 7피치 등반을 이어간다. 이제부터는 처음 가보는 구간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다시금 살짝 가슴이 설레인다.
7피치는 1봉을 내려와서 2봉을 등반한 후 능선을 걸어서 진행하다가 다시 내려와 우측으로 엄청나게 깊은 절벽이 보이는 안부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등반하기 까다로운 부분은 없다. 8피치 출발점에서 우측으로 내려다보이는 낭떨어지는 선녀봉과 경원대길 릿지 사이로 깊게 패인 골짜기로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깊은 심연 속이다. 아무리 고소공포증이 없는 강심장이라도 내려다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아찔한 절벽이다. 짜릿한 고도감이 느껴진다는 걸 제외하면 8피치, 9피치, 10피치의 등반은 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10피치 확보점에 도착해서 처음엔 그곳이 경원대길 정상인줄 알고 인증사진까지 남겼다. 하지만 개념도를 꺼내서 확인해보니 눈앞으로 보이는 피너클 지대를 올라서야 비로소 3봉 정상이었다. 마지막 11피치는 피너클 지대를 올라서서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직벽 좌측의 볼트에 클립한 후 올라서면 된다.
경원대길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장관이다. 솜다리길 루트의 종착점인 솜다리봉의 도드라진 뒷모습이 인상적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하산은 개념도 상에 9피치로 하강한 후 허공다리골로 내려가는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는 판단 하에 새로운 길을 탐험해보기로 한다. 토왕골로 올라갈 때 좌측의 경원대길, 솜다리길, 별을 따는 소년들 루트의 정상부를 잇는 능선길을 따라서 등반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선녀봉 정상으로 올라서기 위해서 그쪽으로 15미터 정도를 자일로 하강했는데 바위에 걸려서 자일 회수가 어렵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등반하여 경원대길 루트를 따라서 하강한 후에 우측으로 돌아서서 안부에 이른다. 설악산 같이 돌출 부분이 많은 암벽에서의 하강은 처음으로 하강 완료한 사람이 자일 회수 상태를 반드시 점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는 순간이다.
이제부터는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탐험등반이 이어진다. 솜다리길 정상에서 이어지는 선녀봉 정상으로 올라서는 루트는 자일을 사용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난이도이다. 이 봉우리에서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 사이의 안부로 내려서는 곳에는 소나무에 슬링이 걸려 있어서 하강 포인트로 사용한다. 여기에서는 경원대길 정상에서 하강할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먼저 하강하여 자일 회수 상태를 점검한 후에 다음 사람이 내려오게 한다. 중간에 한 번 더 하강용 볼트와 슬링을 만날 수 있어서 60미터 자일 한동으로도 안전하게 내려설 수 있었다. 안부에서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로 올라서는 구간은 낙석만 주의하면 큰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해서 토왕골로 내려가는 비교적 편안한 오솔길을 만날 수 있는 토왕폭 사거리 안부에 도착해서 모든 등반을 마무리 한다.
두 번째로 올랐던 경원대길 전반부에서는 향상된 등반 능력을 확인하는 기쁨이 있었다. 처음으로 등반했던 경원대길 후반부를 끝냈을 때는 미완성의 등반 루트를 완료했다는 개운함과 함께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수려한 풍광을 즐겼다는 만족감이 느껴졌다. 허공다리골로 하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탐험하여 토왕폭 사거리에 도착한 등반은 낯선 곳을 찾아가는 모험심 가득한 여정이었다. 그간 쌓인 설악에 대한 그리움이 남김 없이 행복감으로 승화되는 듯한 황홀감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장비를 정리해서 배낭에 집어넣고 하산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전혀 피곤하지 않다. 주변의 들꽃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발걸음이다. 토왕골 계곡의 조그만 폭포 아래에서 탁족하면서 감상에 젖어본다. 설악이 그 자리에서 그 아름다움을 오롯히 간직하면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가슴 뭉클한 일이다.
1. 여덟째 마디 출발 지점에서 바라본 우측 낭떨어지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이다.
2. 목요일 저녁부터 등반 장비를 꾸려본다. 새로 구입한 릿지화도 점검해본다.
3. 비룡폭포 위쪽에서 바라본 토왕성 폭포와 주변 암봉들.
4. 경원대길 초입엔 전에 없던 페인트 표시가 있어서 길 찾기는 좋은데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다.
5. 둘째와 셋째 마디를 끊지 않고 한번에 등반 중이다.
6. 넷째 마디는 직벽에 나있는 세로 크랙에 캠을 설치하면서 오른다.
7. 다섯째 마디는 넷째 마디 확보점에서 우측으로 진입한다.
8. 다섯째 마디는 비교적 홀드 양호한 직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9. 암각에 슬링을 걸어 다섯째 마디의 확보점을 만들어 후등자 확보 중인 모습.
10. 다섯째 마디 확보점에서 우측을 바라보면 선녀봉과 토왕폭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11. 여섯째 마디는 쉬운 침니 구간이고 여기를 올라서면 1봉 정상이다.
12. 1봉 정상과 맞은편 2봉 사이는 티롤리안 브릿지가 가능한 구간이다.
13. 1봉 정상에서 달마봉과 동해 바다 방향으로 포즈를 취해본다.
14. 일곱째 마디를 걸어가서 8피치 시작점인 안부에 도착한다.
15. 여덟째 마디를 출발 중이다.
16. 여덟째 마디 이후의 등반은 쉬운데 우측 절벽의 공포감은 무시할 수 없다.
17. 고도를 높이자 솜다리봉의 뒤통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18. 아홉째 마디의 확보점 부근에는 허공다리골로 하강할 수 있는 하강고리가 설치되어 있다.
19. 열 번째 마디를 오르고 있다.
20. 정상으로 혼동하기 쉬운 10피치 정상 봉우리에서 인증사진을 남겨본다.
21. 마지막 11피치의 피너클 지대를 통과 중이다. 강한 역광 때문에 날등을 타지 않고 우측을 등반했다.
22. 경원대길 정상에서 등반 완료를 외치고 있다. 역광 때문에 사진 상으론 잘 보이지 않는다.
23. 정상의 확보점에서 남긴 인증샷이다.
24. 경원대길 정상에서는 솜다리길 정상이 내려다 보인다.
25. 하강 포인트를 물색하던 중에 정상 바로 밑에서 찍은 컷이다.
26. 선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토왕폭은 손에 잡힐듯 가깝다.
27.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의 마지막 구간이 내려다 보인다.
28. 이곳을 하강 포인트로 해서 1차 하강을 한다.
29. 두번의 자일 하강 끝에 안부에 내려서서 허공다리골 방향을 담아 보았다.
30.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 마지막 구간에 접어들어서 익숙한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31. 토왕폭 사거리에서 하산하던 중 바윗틈으로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씻어본다.
32. 토왕골 계곡에 도착하면 반겨주는 폭포 앞에서 탁족하면서 감상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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