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등반가로 평가 받는 라인홀트 메스너의 명저인 <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게 되었다. 참 읽고 싶었던 책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동안 내 수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산서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책이라는 찬사를 익히 들었던지라 꼭 소장해서 읽고 싶었으나 몇 년 전 책을 구하고자 했을 때는 한글 번역본이 절판된 상태였다. 작년 가을에 다시 출간된 것을 최근에야 알았고 다른 책과 함께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 넣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아내가 고3 수험생인 딸아이의 참고서를 주문하면서 마우스 클릭 실수로 이 책까지 주문한 까닭에 그간 잊고 지냈던 이 책이 일주일 전 즈음에 내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지난 주말부터 읽기 시작한 <검은 고독 흰 고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명저 답게 정말 잘 읽혔다.
메스너는 1970년 낭가바르바트 등반에서 친동생인 귄터 메스너를 잃은 지 8년이 지난 이후에 이 산을 혼자서 오르는 도전적인 등반을 감행한다. 아마도 1978년은 메스너 자신 뿐만 아니라 세계 등반사에 있어서도 결코 잊지 못할 한 해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해 5월에 메스너는 페터 하벨러와 자일파티를 이루어 최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그리고 불과 3개월 후에 낭가파르바트를 역시 무산소로 단독 등반 하는 데에 성공한다. 메스너가 1978년도에 이룩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과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은 후세에 길이 남을 찬란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검은 고독 흰 고독>은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에 대한 메스너 자신의 등반기 초판인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이란 책을 김영도 선생님이 번역하면서 한글 제목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메스너는 2003년도에 이 책의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흰 고독: 낭가파르바트의 먼 길>로 바꾸었다고 하니 역자가 한글판의 제목을 잘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공적인 산소의 도움 없이 세계 최고봉을 올랐다는 사실은 1978년 당시의 메스너를 일약 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매스컴과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당시의 복잡한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메스너가 낭가파르바트의 단독 등반에 나선 건 어쩌면 자연스런 흐름이었는 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면 이에 대한 메스너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메스너는 원정대를 꾸리지 않고 베이스캠프까지 파키스탄 정부에서 의무 규정으로 정해 놓은 최소한의 인원인 연락장교 테리와 의사 우즐라 두 명만을 대동한다. 그리고 베이스캠프부터는 15 킬로그램의 단촐한 배낭을 짊어지고 디아미르 벽을 경유한 등반에 나선다. 8천 미터 이상의 고봉을 단독으로 오른다는 건 당시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메스너는 혼자서 모든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극한의 세계 속에서 느꼈던 심리 상태를 세밀하게 기술한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어떤 철학자나 구도자가 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이 있는 사색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메스너는 등반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피켈을 삼각대로 사용하여 셀카를 찍고, 촬영을 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친구가 알미늄 통과 함께 준 구텐베르크 성경의 첫 장을 정상에 남겨둘 물건으로 가져가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산서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낭가파르바트는 내게 더욱 의미 있는 산으로 다가왔다. <8천 미터 위와 아래>의 저자인 불세출의 등반가 헤르만 불이 초등한 산이고, 등로주의를 주창한 알버트 머메리가 사라졌던 곳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검은 고독 흰 고독> 속에서도 불과 머메리에 관한 글이 자주 나온다. 라인홀트 메스너 자신도 네 번이나 오를 정도로 낭가파르바트를 마음 속의 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산악인 고미영 씨가 하산하던 중 실족사한 곳도 낭가파르바트이다. 우리 나라에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봉우리 14좌 열풍이 불었을 때 경쟁적으로 몰아부친 상업적 등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아서 고미영 씨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좀 안타까운 심정이다. 정작 14좌의 원조격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8천 미터 이상의 고봉들을 모두 올랐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무산소 등정, 단독 등반, 알파인 스타일, 신 루트 개척 등과 같이 늘 새로운 영역에서 인간 영역의 극한에 도전했다는 내용적인 면이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남 따라하기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등반 행태에서도 어쩔 수 없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다른 어떤 등반가의 저술보다 메스너의 글은 탁월하다. 예전에 읽었던 <죽음의 지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검은 고독 흰 고독>은 더욱 특별한 것 같다. 책 속에 있는 글귀 하나 하나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책 속의 문장 몇 가지를 인용해 본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고 꿈에서 현실을 구하는 일, 그것을 나는 안다. 산에 오르기 전에 그 루트를 그려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대체로 스스로 체험하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노력과 의지를 순수한 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세상을 알고자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도전하는 것 등과 같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지금 당장 필요나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식의 실제적인 일이어야만 한다."
"나는 여기 쌓여 있는 눈과 바위와 구름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니까.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요 속에서 분명히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 고독은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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