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 사월 초파일인 황금 연휴 기간이다. 설악산 등산로가 개방되는 첫 주말이기도 하다. 이틀 간의 등반을 설악에서 온전히 즐기고 싶어 목요일 밤 열 시 경에 서울을 떠난다. 밤 한 시가 지나지 않아 설악동에 도착하여 암장허가서를 챙긴 후 설악동 야영장에 여장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야영장은 마땅한 자리가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다. 요즘 캠핑이 대세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할 수 없이 주차장 한 켠에 텐트를 설치하려 했으나 이번엔 정신이의 텐트가 고장이다. 결국 우리는 설악동 C지구의 장급 여관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 등반을 위해 곧바로 잠자리에 든다.
여명으로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한 새벽 다섯 시 경에 기상하여 햇반과 인스턴트 미역국으로 끓인 죽을 먹고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비룡폭포 가는 길의 마지막 집인 미리내산장은 영업을 중단하고 철거할 모양새를 하고 있다. 등반을 끝내고 내려오면서 막걸리 한 사발 나누며 안면이 있는 산장 주인 아저씨를 우연히 만나서 반갑게 인사한다. 토왕골로 접어드는 초입에서 바라보는 바위 군상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긴다. 골짜기 왼쪽 끝자리에 위치한 선녀봉을 지나면 곧바로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 초입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토왕골이 시끄러울 정도로 여기 저기에서 등반자들의 구호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도 장비를 착용하고 등반을 시작한다.
이번 등반의 자일파티는 이 주 전의 천등산 등반 때와 같다. 정신이와 그의 아내 선희씨, 은경이와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줄을 묶는다. 우리가 막 출발하려는데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한 무리의 등반자들이 떠들썩하게 출발점에 도착한다. 정신이가 선등하고 내가 빌레이 중인데 그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등반에 집중할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좀 조용히 해주실 것을 정중히 부탁하고 등반을 이어간다. 무엇인가 들뜬 분위기의 그 팀은 어프로치를 잘 못하여 한 시간 이상을 허비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팀은 등반 중 한 사람이 중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여 헬기로 후송되는 사태를 당하게 된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걱정과 함께 무엇보다 안전한 등반을 위해 여러 가지를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 등반은 좌측으로 선녀봉을, 우측엔 토왕성폭포를 두고 진행하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산악미의 결정체를 가장 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루트가 아닐까 생각된다. 중급 정도의 난이도에 안자일렌 구간을 포함하면 전체 12 피치 정도 되는 긴 거리의 등반을 이어갈 수 있다. 등반 내내 사방으로 눈을 사로잡는 황홀한 풍경이 연속되니 피로를 느낄 틈이 없다. 네 번째 피치에서 만나게 되는 디에드르 크랙 형태의 직벽과 전반적으로 약간의 오버행을 이룬 여섯 번째 피치는 초보자들이 시간을 많이 지체하는 크럭스 구간이다.
여섯 째 마디의 크럭스 구간에 지체되어 있는 앞 팀 때문에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초보자들이 대부분인 이 팀은 선등자가 위에서 간접빌레이를 보는 대신 다음 등반자들이 등강기를 이용해 이 삼 미터 간격을 두고 연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중 두 세 명은 올라가고 서 너 명이 올라 가지 못하여 결국 포기하고 탈출을 결정하게 된다. 내 생각엔 선등자의 등반 시스템이 전혀 합리적이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앞 팀의 탈출 이후에 우리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네 명 모두 크럭스를 돌파한다. 하지만 우리 뒤에 오던 팀은 바로 이 곳 크럭스에서 무슨 실수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큰 사고를 당하여 부상자가 헬기로 후송되는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초입에서 무언가에 쫒기듯 여유가 없어 보이고 다른 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보였던 바로 그 팀이다.
우리 앞과 뒤의 팀들에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니 더욱 안전에 신경쓰면서 등반에 집중하게 된다. 정신이가 선등하고 피치를 짧게 끊은 후의 쉬운 구간에서는 내가 앞서기도 하면서 등반을 이어가니 다시금 등반의 즐거움이 되살아난다. 토왕 좌골 릿지길과 선녀봉의 솜다리길을 오르는 등반자들과 나란히 진행하면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피치 중간에 쉬면서 뒤돌아본 노적봉에서 사인의 우정길을 오르는 등반자들도 개미처럼 보인다. 토왕성 하폭의 직벽을 오르는 이들의 구호 소리도 메아리를 치며 우리가 등반하는 곳까지 잘 들린다. 그동안 설악에서 하지 못한 등반에 대한 갈증을 마음껏 풀고 싶다는 듯 모든 팀들이 등반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모습이다.
토왕성폭포의 상단과 하단을 완전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게 되니 어느새 정상이 코앞이다. 높아보이던 선녀봉도 이미 발 아래에 놓여있다. 날씨도 쾌청하여 시야도 훌륭하다. 등반내내 긴장감을 가지고 임했던 탓에 오히려 더욱 즐겁고 알찬 등반이 이루어진 것 같다. 등반을 마치고 사우나에서 몸을 씻은 후 여관방 뒷마당에서 구워먹은 삼겹살과 복분자주의 맛은 세상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꿀맛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행과 반대로 움직이면 얻을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캠핑이 대유행인 요즘엔 야영장보다 고교시절 수학여행 때 한 방에 여러 명이 숙박했던 바로 그 여관방이 훨씬 더 저렴하고 쾌적한 숙박시설일 수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설악에서 등반할 때는 이 오래된 여관방을 자주 이용할 듯하다.
1.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 후반부엔 칼날 능선이 많아 암각에 적절히 확보하는 것이 안전하다.
2. 릿지길 중간 이후에서는 우측으로 우리나라 제일의 토왕성폭포 상단과 하단을 모두 볼 수 있다.
3. 이른 새벽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맑은 공기 탓인지 제법 쌀쌀하다.
4. 비룡폭포 왼쪽 봉우리에 올라서면 토왕골이 한 눈에 보인다. 선녀봉과 토왕성폭포가 아침빛에 빛나고 있다.
5. 별을 따기 위해서는 토왕골 깊숙히 잠입해야 한다.
6. 별따기 릿지길 출발점이다. 1 피치 초반부는 보기보다 까다롭다.
7. 선등하는 정신이는 빨간 바지가 잘 어울린다.
8. 여섯 번째 마디의 크럭스에서 앞 팀이 애를 먹고 있다. 초보자들인 듯한데도 대부분 어프로치화를 신은 상태다.
9. 앞 팀 때문에 지체될 때는 들꽃 찾으며 사진찍기 놀이 하는 것이 제격이다. 에델바이스로도 불리는 솜다리가 예쁘다.
10. 앞 팀이 포기하고 탈출할 수 밖에 없었던 크럭스 구간을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돌파한다.
11. 바로 옆에서 선녀봉의 솜다리길 등반을 완료한 팀이 하강하고 있다.
12. 토왕폭 코앞의 좌골릿지길에서도 한 팀이 등반 중이다.
13. 뒤돌아 보이는 노적봉에 있는 사인의 우정길에 붙어있는 개미들이 여러 팀 보인다.
14. 우리 뒤에 오던 팀에서 사고자가 발생하여 헬기가 떴다.
15. 골짜기에 울려퍼지는 헬기 소리를 들으며 더욱 안전에 신경쓰면서 등반을 이어간다.
16. 점심을 먹고 휴식하는 시간에 레이백 연습을 해본다.
17. 나이프 릿지를 이루고 있는 피너클 지대에선 밸런스가 중요하다.
18. 이 크랙 구간을 올라가면 사실상의 등반은 종료된다. 나무를 넘어선 이후가 약간 까다롭다.
19. 우리가 올라온 별을 따는 소년들 릿지길 전체를 굽어본다.
20.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적당한 긴장감 때문인지 밀도있는 등반을 했다는 뿌듯함이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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