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천등산 등반을 하기 위함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르다가 대전에서 통영가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얼마가지 않아 추부 나들목이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면 대둔산으로 향하는 17번 국도를 탈 수 있다. 대둔산 입구를 조금 더 지나 고개길을 내려서면 좌측으로 천등산 암벽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천등산 암벽 등반을 하기 위해선 도로변 주차장에 차를 대놓아야 한다. 서울에서 이 주차장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새벽 5시 40분 경에 집을 나와 죽암휴게소에서 햄버거와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우리가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9시 반 경이다.
주차장에서부터 장비를 착용하고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도로와 나란히 흐르는 괴목동천을 건너면 얼마 가지 않아 올망졸망한 돌무더기에 새겨진 암벽길 이정표가 보인다. 계곡에는 마땅한 징검다리가 없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한다. 신록이 짙어지는 오월이라 그런지 아니면 따뜻한 남쪽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계곡물이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로변에 서면 천등산 암벽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 끝 날등엔 <어느 등반가의 꿈>이 있고, 우측 끝 하늘벽 위에는 <민들레> 릿지길이 자리한다. 우리가 등반할 <처음처럼> 릿지길은 이 두 갈래 암릉의 중간을 가르고 서있는 루트이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정보엔 평균 난이도 5.9, 최고난이도는 5.10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신이와 그의 어부인, 은경이,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처음처럼> 릿지길의 자일파티를 이루었다. 정신이의 안사람과 실전등반을 같이 하기는 처음이다. 정신이 부부는 인공암벽에서 틈틈히 등반을 같이 했고, 인수봉 고독길도 두 사람이 다녀온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번 등반에서도 별 어려움은 없다. 언제나처럼 정신이가 퍼스트, 내가 쎄컨을 맡고, 세번째로 정신이의 안사람이 오르고 은경이가 라스트를 맡는 순서로 등반한다. 첫 번째 피치부터 쉽지 않은 난이도이다. 초입이 약간 오버행이고 홀드도 아래로 흐르는 형태라서 양호하지 않다. 정신이 다음으로 오르는데 영 자세가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주마링으로 돌파한다.
두 번째 피치는 이십여 미터의 직벽으로 좌측의 길게 뻗은 크랙을 따라 오른다. 크랙의 홀드는 양호한 편이지만 좌향 레이백을 간간히 써야 하는 수직으로 뻗어내린 크랙이 등반을 힘들게 한다. 일 피치와 이 피치가 어려워서 자일파티 모두가 힘겨워 하는 듯하다. 그래도 선등하는 정신이는 씩씩하게 잘 오르고 있으니 마음 든든하다. 세 번째 피치는 세 개의 짧은 벽과 두 구간의 뜀바위가 번갈아 나타나는 곳으로 비교적 다른 피치에 비해 쉬운 난이도를 보인다. 등반을 시작할 때에는 아래로 보이는 도로의 자동차 소음이 귀에 거슬렸으나 등반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난이도 탓인지 어느새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삼 피치 중간의 안부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주변 풍광을 감상한다. 좌측으로는 <어느등반가의 꿈> 마지막 피치의 날등 직벽으로 등반하는 팀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친다. 우측의 <민들레> 릿지길의 첫 번째 독립봉의 직벽에도 한 팀이 붙어있다. 발 아래로는 신록의 푸르름이 더해가는 풍성한 숲이 펼쳐져 있고 숲 가장자리를 이루는 듯한 괴목동천의 물빛이 청아하다. 계곡과 나란히 곡선으로 뻗어있는 17번 국도엔 간간히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도로변 주차장에 세워둔 나의 애마도 훤히 보인다. 골짜기를 막아 댐을 만들 요량인지 맞은 편의 대둔산 허리를 깍아내려서 좀 더 높은 표고로 국도를 높이는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만이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다.
점심을 먹고 네 번째 피치 등반을 이어간다. 짧은 벽을 넘으면 십여 미터의 벽이 다시 나타나는데 미세한 홀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피치는 칠 팔 미터의 침니를 오른 후 십오 미터의 페이스 등반을 이어가야 한다. 사선으로 난 크랙과 밴드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추락할 경우 펜듈럼을 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침니 위까지 뒤에 오는 두 사람을 올리고 나니 팔에서 쥐가 날려고 한다. 처음 겪는 현상이라 약간 당황스럽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배드민턴으로 무리한 팔에 충분한 휴식을 주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선등한 정신이가 두 개의 레더를 적절히 설치하여 마지막 피치의 페이스도 모두가 안전하게 등반을 마친다.
릿지길 정상에는 어려운 등반을 마치고 난 우리를 반겨주는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지게 서있다. 정상 인증 사진을 남기고 자일 육십 미터 두 동을 이어 피치 하강한 후 계곡에서 세족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등반을 마치고 난 후에 다시 올려다보는 천등산 암벽군은 등반을 시작할 때 대했던 설레임과는 다른 새로운 친숙함으로 찾아든다. 봄빛이 짙어가는 천등산에서 좋은 친구들과 그 이름도 멋진 <처음처럼>길을 등반한 만족감이 크다. 신영복 선생의 서화 에세이집 <처음처럼>에 나오는 글귀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과 같이 하루 하루를 새로운 설레임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천등산 괴목동천 주변의 맑은 물을 머금고 푸르름을 더해가는 신록의 나무들처럼.
1. 등반내내 괴목동천의 맑은 물빛과 17번 국도가 내려다보인다.
2. 도로변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등산 암벽군. 좌측부터 <어느 등반가의 꿈>, <처음처럼>, <민들레> 암릉길이 차례로 도드라져 보인다.
3. 주차장에서 괴목동천으로 내려서면 마땅한 징검다리가 없어서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한다. 이런 재미도 좋다. 물은 차지 않다.
4. 계곡 건너면 만나게 되는 루트 이정표. 우측으로 가다 왼쪽 편의 너덜로 오르면 <처음처럼> 초입이다.
5. <처음처럼> 릿지 등반 출발점이다. 동판에 개념도가 잘 그려져 있다.
6. 첫 번째 마디는 항상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초입이 약간 오버행이라 정신이가 중간에서 후등자 확보를 보고있다.
7. 두 번째 마디는 수직으로 뻗어내린 직벽의 좌향 크랙이다. 보기보다 체력을 요하는 구간이다.
8. 둘째 마디 위에서 밑을 내려다 본다. 약간의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함을 느낄 수 있다.
9. 정신이가 뒤에 등반하는 자기 아내를 확보해주고 있다.
10. 셋째 마디 중간엔 뜀바위가 두 군데 있다. 첫 번째 뜀바위는 약간의 담력을 요한다.
11. 정신이의 아내는 뜀바위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훌쩍 뛰어 넘었다. 뒤로는 도로의 표고를 높이는 공사 현장이 내려다 보인다.
12. 테라스에서의 점심 식사 직후 두 번째 뜀바위 구간을 등반 중이다. 이 구간은 다리를 걸친 후 건널 수 있어서 비교적 쉽다.
13. 좌측으로는 <어느 등반가의 꿈> 마지막 피치에 붙은 등반자의 모습이 아스라히 보인다.
14. 네 번째 마디를 등반 중이다. 어느 곳 하나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
15. 넷째 마디 위에서 등반자를 내려다 본다.
16. 후등자 확보 중인 정신이 뒤로는 <어느 등반가의 꿈>길 정상부가 펼쳐진다.
17. 넷째 마디의 확보점에서 후등자 빌레이 중인 정신.
18. 다섯째 마디는 침니 중간까지 오른 후 우측으로 이어지는 페이스를 등반해야 한다.
19. 사선으로 뻗은 크랙과 밴드를 잘 이용해야 하는 마지막 구간을 선등 중인 정신.
20. 릿지길 정상에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는 멋진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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