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청산장엔 간밤에 세찬 눈보라가 몰아쳤다. 새벽에 잠을 깨어 화장실 가는 길에 보니 여전히 바람은 세차다. 하지만 속초 시내의 야경이 별빛처럼 영롱하다. 아침에 좋은 풍경을 기대해도 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여섯 시 반 경에 기상하여 담요를 반납하고 산행 준비를 서두른다. 지우랑 같이 아이젠과 스패치를 착용하고 헤드랜턴까지 만반의 준비를 한다. 밖으로 나와보니 여명 속에 대청봉이 또렷하고 속초시내의 불빛도 잘 보인다. 헤드랜턴은 착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천천히 소청봉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대부분의 산객들은 일출을 보기 위해 대청봉으로 향한다.
서북릉과 소청봉 갈림길에서 살펴보니 눈 쌓인 길 위에 발자국이 하나도 없다. 잠깐 망설이다가 위험하면 되돌아올 생각으로 전진한다. 익숙한 등산로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지만 눈이 켜켜히 쌓인 산길은 항상 조심해야만 한다. 길을 개척한다는 심정으로 스틱을 찍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아무도 걷지 않은 신설을 밟고 가는 기분은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오늘만은 지우와 내가 남긴 발자국을 다른 이들이 따라올 것이다. 중청봉을 우회하는 산길엔 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뭇가지의 리본을 찾아가며 눈길을 헤쳐나간다. 제법 눈이 쌓여 어떤 곳은 무릎까지 빠진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고 누군가 걸었던 자취를 여러 사람이 따라가다 보니 길이 되었다". 루쉰의 말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니 묘한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뒤에 오는 지우에게는 산에 익숙한 아빠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면서 내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오라고 일러준다.
천천히 진행하며 바라보는 주위 풍광은 황홀할 정도다. 주변의 설화는 바닷속 산호초 군락이 부럽지 않다. 공룡능선을 넘나드는 구름은 파도처럼 일렁인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는 구름에 가렸지만 하늘은 밝게 빛나고 있다. 중청봉 우회로에서 돌아본 대청봉은 푸른 새벽빛을 고스란히 머금고 평화롭게 서있다. 소청봉으로 내려서는 계단길을 만나니 길 찾을 염려가 사라져서 좋다. 서북주릉 안쪽의 내설악이 한 눈에 펼쳐지는 소청봉의 조망은 언제봐도 장쾌하다. 바람은 세차지만 운해가 넘실거리는 내설악과 공룡능선의 구름파도, 외설악과 속초 앞바다까지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광은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겨울의 설악에서만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설화와 눈보라 속에도 의연히 서있는 키 작은 침엽수들을 감상하며 곳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무게 때문에 가져오지 않은 DSLR 카메라가 아쉽긴 하지만 내 전신의 감각기관과 육안을 통해 가슴 속까지 파고든 설악의 모습이 진짜라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봉정암 갈림길에서 희운각산장 방향으로 급사면을 내려선다. 간간히 엉덩이 썰매를 타고 신설 위를 미끄러지는 기분이 최고다. 지우도 엉덩이 썰매 타는 게 신기한지 표정이 해맑게 빛난다. 희운각산장 내려서는 중간에 처음으로 올라오는 두 분의 산객들을 만난다.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 나누며 안전 산행을 기원한다. 그 후로도 환상적인 풍경과 썰매타기를 즐기며 희운각산장에 도착한다. 희운각에서 나는 즉석 북어국에 햇반을 끓여먹고 해물을 먹지 않는 지우는 라면 하나를 끓여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 희운각에서 무너미고개를 지나 천불동으로 내려서는 내리막 길에서도 간간히 엉덩이 썰매타기를 즐기며 내려온다.
포근해진 날씨 덕분인지 천불동 계곡의 모든 폭포는 힘찬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계곡의 청아한 옥색 물빛은 이미 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눈이 쌓여 다져진 천불동의 등로는 걷기에 편하다. 간간히 눈사태의 흔적도 발견된다. 예전에 공룡능선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던 천불동길은 돌길이 많아 퍽퍽한 느낌이 강했었다. 눈길은 상대적으로 푹신한 느낌을 전해주니 지우와 둘이서 대화하며 내려오기 더없이 좋다. 지우가 좋아하는 야구 얘기를 꺼내니 비로소 지우의 말문이 터진다. 메이저리그 구장 얘기와 류현진, 추신수 선수에 대한 전망, 투수 린스컴이 선수로 뛰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팀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보니 지루할 새 없이 어느새 비선대 다리에 도착한다.
등산객과 관광객을 나누는 경계 지점인 비선대를 지나 소공원으로 향하는 길 중간의 볼더링터에서 아이젠과 스패치를 벗고 배낭을 정리한다. 신흥사 가기 전의 음식점에서 감자부침과 막걸리 한 사발로 하산주를 나눠마신다. 아들인 지우와 함께 뜻깊은 겨울 산행을 설악에서 즐겼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차오른다. 맛있는 돌솥비빔밥 하나를 나눠먹고 식당 문을 나선다. 설악동에서 산행을 마무리하고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오른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5분 후에 출발하는 2시발 동서울행 우등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는 미시령터널을 통과하여 국도를 달린 후 동홍천에서 고속도로를 탄다. 피곤했던 탓인지 지우는 버스가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깊은 잠에 빠진다. 하루 사이에 서울엔 눈이 많이 내려 다른 세상이 된 것 같다. 설악에 이 정도 눈이 내렸으면 당연히 출입을 통제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렁인다.
1.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 구름에 가린 해 아래의 화채릉이 선명하다.
2. 중청산장에서 출발할 때 바라본 대청봉. 여명의 푸른 빛이 감돈다.
3. 중청봉 우회로에서 돌아본 중청산장. 일출을 기대하며 대청으로 향하는 산객들이 보인다.
4. 아무도 밟지 않은 신설을 걷는 기분은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5. 따라오는 지우에게는 두려운 마음을 내비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좋은 풍경을 즐기라고 말한다.
6. 길을 찾아갈 때에는 인공구조물이 반가운 법이다. 공룡능선을 넘나드는 구름파도가 환상적이다.
7. 설화와 운해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에 사진 촬영을 많이 한다. 무게에 대한 압박으로 올림푸스 미러리스 카메라를 가져왔다.
8. 소청봉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나니 길을 찾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어진다.
9. 구름에 덮인 귀때기청봉을 위시한 내설악의 장엄한 풍경이 펼쳐진다.
10. 세찬 눈보라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침엽수들의 모습이 멋지다.
11. 공룡능선은 외설악과 내설악을 가른다. 구름은 그 능선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12. 하얀 죽음의계곡 너머의 천불동과 화려한 외설악의 장관이 펼쳐진다.
13.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억지로 포즈를 취한 지우. 본인 몰골이 맘에 안 든다며 한사코 사진찍기를 사양한다.
14. 설화와 운해가 하도 좋아서 나도 기념 사진을 남긴다.
15. 무너미고개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신선대. 신선대는 공룡릉의 시작부.
16. 천불동의 폭포는 모두 녹아내려 청아한 물소리와 함께 힘찬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17. 천불동 계곡의 절벽미는 언제봐도 기막히다.
18. 계곡도 얼음을 걷어치우고 옥색 물빛을 발하고 있다.
19. 천불동 계곡의 등로 중간엔 눈사태의 흔적이 심심찮게 보인다. 사진은 오련폭 주변.
20. 귀면암에 도착하면 비선대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21. 비선대 부근의 장군봉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다. 금강굴도 또렷히 보인다.
22. 소공원 내려가는 길 중간의 볼더링 터에서 아이젠과 스패치를 해체하고 배낭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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