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알프스에서 잃어버린 시계와 영화 <티벳에서의 7년>

빌레이 2010. 6. 19. 12:37

샤모니에서 둘째 날인 6월 6일 쁠랑드레귀(Plan de l'Aiguille, 2310 미터)에서 하산하는 도중에 시계를 잃어버렸다.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 3842 미터) 전망대와 이태리 쪽에 있는 헬브로너 전망대까지 환상적인 몽블랑 산군의 경치에 약간은 흥분한 상태였던 것 같다. 케이블카의 중간 기착지인 쁠랑드레귀에서부터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원래 계획은 산 허리를 돌아 트레버스하는 코스로 몽탕베르 역 쪽으로 트레킹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쁠랑드레귀 산장에서 갈라지는 그 길을 가는 중간에 눈이 녹아 있지 않아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산장으로 되돌아와 샤모니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잡았다.

 

산장에서 내려가는 그 길도 눈이 듬성 듬성 남아 있었다. 마침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내려가셔서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한데 중간에 자꾸 가기 어려운 길로 가시는 것이었다. 큰 바위가 있는 너덜길에서 좀 애매한 곳이 나타나길래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배낭을 벗는 순간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시계가 바위틈으로 떨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시계는 한참이나 바위틈새로 떨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바위틈은 깊었다. 어찌해서 찾아보려고 한참을 노력했으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낭패다 싶었다. 혼자 산행할 때 시계는 필수품인데. 휴대폰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내게 유럽에서 시계는 생각보다 필요한 물품이다.

 

잃어버린 그 시계는 12년 동안 내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시간도 잘 맞고 지금까지 유리에 스크레치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내구성이 강한 고급 시계다. 1998년도 어느 학회에서 논문상 수상 기념으로 받은 시계였는데 참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까워도 어쩌겠는가, 빨리 털어버리는 수 밖에. 카메라 떨어뜨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도 계속 산행을 해야 하는 게 문제여서 그 다음 날 아침 샤모니의 시계점에서 비싸지 않은 프랑스제 시계를 하나 구입해서 트레킹 하는 동안 요긴하게 사용했다. 잃어버린 시계가 아깝기는 했지만 새로 산 시계도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은 여러 번 볼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하러와 원정대장인 친구 페터 사이에 시계 때문에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티벳을 방황하는 중에 페터의 시계를 팔아 둘은 먹을 것을 좀 구한다. 그 시계는 페터의 아버지가 주신 중요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하러에게는 시계가 세 개나 더 있었는데 팔지 않아서 둘은 다투게 된다. 하러는 진심으로 사과하게 되고 둘은 그 때부터 더욱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다.

 

몇 년 후에 티벳에서 두 사람은 달라이 라마를 도우며 자리를 잡게 된다.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러의 집에서 열었을 때, 하러는 페터의 시계를 다시 찾아 친구에게 선물한다. 라싸의 풍물 시장에서 우연히 하러가 발견하여 다시 구입한 것이다. 시계를 다시 받은 페터는 눈물을 글썽이며 친구에게 고마워 한다.

 

알프스에서 내가 잃어버린 시계가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을 생각나게 했다. 내 시계는 알프스 바위틈에 숨어버렸으니 다시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쁠랑드레귀에서 샤모니로 하산하는 그 길에 내 시계가 묻혀있다는 사실만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도 또 하나의 추억거리라 생각한다.

 

 

1. 시계를 잃어버린 장소... 생각보다 내려오는 길이 험했다..

 

2. 이번 알프스 트레킹에 새로운 동반자가 된 시계... 샤모니 시계점에서 85 유로 주고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