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 아래 봄바람은 보드랍고 바지런한 산새들의 지저귐은 청아하다.신록이 차오르는 봄숲은 푸르른 몸집을 키우는 데 한창이다. 요즘처럼 등반하기 좋은 시절에 주말 날씨가 쾌청하다는 건 여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아름다운 계절에 백운대 남서벽의 유서 깊은 루트인 '시인 신동엽길'을 오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15년 10월 17일에 이 루트를 6피치까지 등반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기회가 된다면 '신동엽길'을 완등하여 백운대 정상을 밟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슴 한켠에 늘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계획했던 두세 차례의 신동엽길 등반 계획은 매번 무산되기 일쑤였다. 워낙 인기 높은 바윗길인지라 매번 정체현상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우리팀이 제일 먼저 바위에 붙을 수 있었다. 우리 앞에 한 팀이라도 있으면 약수릿지 등반으로 계획을 수정하리라는 플랜B는 결과적으로 기우에 불과했다. 운 좋게도 하루종일 우리팀이 '신동엽길'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기석형, 기영형, 은경, 민지씨, 나, 이렇게 5명이 오늘의 환상적인 등반팀을 구성했다. 요세미티 원정 등반을 앞두고 있는 민지씨는 기영형의 권유로 훈련을 겸해서 참석했다. 첫 피치부터 긴장감 높은 슬랩을 올라야 했고, 다소 어려웠던 2피치까지는 몸이 풀리지 않아서 내심 걱정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그런대로 등반이 잘 이루어졌다. 난이도 5.11a로 기록된 5피치를 군더더기 없는 만족스런 동작으로 자유등반에 성공했던 순간이 짜릿했다. 7피치 이후의 후반부는 체력이 소진되어 더욱 집중해서 올라야만 했다.
아침 7시 30분에 우이동을 출발하여 백운산장과 위문을 통과하는 1시간 30분 정도의 어프로치 후, 09시 26분에 1피치 암벽에 붙을 수 있었다. 자일파티 5명 모두가 9피치를 종료하고 장비를 정리한 후 백운대 정상을 밟은 시각은 오후 6시 정각이었다. 어느 한 구간 쉽사리 오를 수 있는 피치가 없었을 정도로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는 등반이었다. 그런 만큼 모두가 안전하게 등반을 마치고 정상에 올라선 순간의 환희는 특별했다. 태극기 펄럭이는 백운대 정상에서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사광을 받아 빛나는 주변 풍광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차고 뿌듯한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 난이도 5.11a인 5피치 둘째 볼트에 클립한 후 숨을 고르면서 다음 동작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사선 크랙을 통과할 때, 니바(kneebar) 동작까지 사용하면서 깔끔하게 완등했던 순간의 희열은 나의 뇌리에 오래도록 각인될 것이다.▲ (08:01) 요즘 주말 날씨는 클라이머들에겐 큰 축복이다. 하루재를 지나면서 만나는 인수봉의 자태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08:27) 어프로치 도중 백운산장에서 처음으로 쉬었다.▲ (08:41) 등반 출발점은 위문을 통과해서 잠시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야 한다.▲ 위문을 통과하면서 백운대 정상 방향으로 올려다본 경치가 일품이었다.▲ (09:28) 1피치 첫 볼트에 클립하는 중이다. 몸이 풀리지 않은 첫 피치는 늘 그렇듯 부담스러웠다. 사선 밴드에 진입하기 전의 슬랩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난이도는 5.10a에 등반 거리는 30미터.▲ 2피치 초반부는 사선 밴드를 따라가다가 크랙으로 올라 붙는 루트이다. 난이도는 5.10c에 30미터 거리.▲ 2피치는 크랙에 진입한 후 상단부가 크럭스였다. 좌측 날등의 포켓 홀드와 벽면의 작은 누룽지 홀드를 잡고 일어서야 했다.▲ 2피치 후반부를 오르고 있는 기석형의 모습. 4피치까지는 나, 은경, 기석, 기영, 민지 순서로 등반했다.▲ 3피치는 비교적 쉬운 책바위 형태의 크랙이다. 스태밍 자세로 오르면 체력을 아낄 수 있다. 난이도 5.7에 20미터 거리.▲ 4피치 초반부는 손맛 좋은 직상 크랙이다. 좌향 크랙이므로 왼손을 멀리 뻗는 레이백 자세로 진행하니 안정적이었다. 중간 밴드에서 충분히 쉴 수 있었다.▲ 4피치는 크랙이 끝나고 트래버스하는 구간에서 홀드를 잘 찾아 밸러스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난이도 5.10a에 30미터 거리.▲ 기석형이 조금은 살 떨리는 4피치 트래버스 구간을 통과하고 있다.▲ (11:43) 4피치 확보점은 유명한 '신동엽 테라스'이다. 여기서 5명 모두가 모여 간식도 먹고 잠시 쉬어갔다.▲ 난이도 5.11a에 등반 거리 20미터인 5피치 초반부를 스태밍 자세로 올라서서 크랙에 캠을 설치하는 중이다. 자유등반 방식으로 돌파하고 싶어서 배낭을 벗고 가볍게 붙었다. 5피치 등반라인이 곡선으로 꺽이는 오버행이라 확보점에서 배낭을 끌어올리기가 쉬웠다.▲ 손홀드 좋은 크랙 구간을 레이백 자세로 올라서서 첫 볼트에 클립한 후, 과감하게 스태밍 자세를 취하고 둘째 볼트에 클립하는 동작이 아주 안정적이었다.▲ 트래버스 구간이 있는 5피치에서 민지씨의 안전을 위해 라스트를 맡은 기영형이 안정적인 자세로 둘째 볼트를 통과하는 중이다.▲ 기석형이 통과 중인 이 구간이 가장 까다로웠는데, 나는 오른발을 깊게 디디고 니바(kneebar) 자세를 취했더니 오른손을 뻗어서 좋은 홀드를 잡을 수 있었다. 여기만 통과하면 아래 부분의 수평 크랙이 아주 좋은 손홀드가 된다. 5피치를 완등한 순간 도파민이 폭발한 듯한 쾌감이 있었다.▲ 개념도 상에 난이도 5.11b에 35미터 거리로 기록된 6피치는 초반부의 오버행 크랙이 크럭스 구간이다. 나는 에너지를 아끼기로 하고 첫 볼트 클립 후, 퀵드로를 잡고 일어서서 낡은 슬링이 걸려있는 두 번째 볼트에 클립했다. 다음엔 크랙에 캠 하나를 설치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구간은 확보자가 시야에서 사리지니 조금은 긴장하면서 올라야 했다.▲ 6피치 확보점에서 후등자 확보 중인 기석형과 등반 중인 민지씨의 모습이 보인다.▲ (13:54) 6피치를 올라서면 노적봉이 정면에 보이는 전망 좋은 테라스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위문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이어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곳이다. 체력이 바닥났거나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여기서 등반을 종료하고 탈출을 결정해야 한다. 우리팀은 7피치 출발점에 모여서 상의한 끝에 등반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9피치까지 완등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다시 찾아오기 힘들 것이란 생각에서 나와 기영형이 다른 세 명을 설득했던 면이 없잖아 있었다. 체력을 감안해서 등반 순서도 나, 기영형, 기석형, 민지씨, 은경 순서로 조정했다.▲ 난이도 5.10c에 35미터 거리로 기록된 7피치는 전체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았던 구간이다. 초반부에 신설된 우측 라인의 첫 볼트가 너무 높았다. 너트를 설치할 수 있는 실크랙이 있었지만, 너트를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스러운 순간이었다. 할 수 없이 손홀드가 좋아 보이는 기존 루트인 좌측 라인을 따라 올라서 신설 라인의 둘째 볼트에 클립했다. 이 구간에서 좌측 크랙에 캠을 설치하기가 옹색하여 살짝 긴장했으나 그런대로 홀드가 잘 잡혀서 무사히 우측으로 트래버스 할 수 있었다.▲ 둘째 볼트에 클립한 후, 행도깅 상태에서 캠을 회수하고 첫 볼트에도 클립했다. 그런 후에는 안심하고 오버행 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7피치는 기영형이 쎄컨으로 등반했다. 오버행 턱을 넘어선 후에도 곡선으로 뻗은 짧지 않은 크랙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레이백 자세가 잘 먹혔다. 확보점 직전에서는 언더홀드를 잡고 진행하던 중 왼발이 로프를 밟는 바람에 살짝 미끌리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난이도 5.9에 30미터 거리의 8피치는 사선 크랙 구간에서 제법 완력을 요했다. 캠이 잘 먹히는 크랙이라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크랙이 끝나고 나타난 슬랩이 긴장감을 유발했다. 여기서부터는 내 체력이 많이 소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8피치 확보점에서의 풍경이다. 저 멀리 한강 물줄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16:31) 내가 9피치 확보점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8피치 확보점에서 올려다본 장면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자켓을 입어야 했다.▲ 난이도 5.10b에 40미터 거리인 9피치도 그리 호락호락한 구간은 아니었다.▲ (17:08) 5명 모두가 9피치까지 등반을 마무리하고, 기석형과 기영형이 로프를 정리하는 중이다.▲ (17:27) 모든 등반이 끝나고 후련한 마음으로 안부에서 장비를 정리했다. 9피치를 완료하면 백운대 정상까지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60미터를 로프로 하강하여 위문으로 곧장 탈출할 수도 있다. 등반 인원이 소수이고 시간만 허락한다면 10피치를 등반해서 'SR형제길' 종점과 같은 봉우리에 오를 수도 있다.▲ 오늘은 '시인 신동엽길' 9피치를 완등한 것에 만족하고,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대 정상으로 향했다.▲ 예전엔 철난간이 설치되어 있던 구간을 올라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나와 기영형이 먼저 오른 후에 후등자들을 위해 로프를 설치했다.▲ (18:00) 단체 사진을 남긴 시각이 오후 6시 정각이었다. 홍콩에서 온 친구가 구도를 잘 잡아서 촬영해주었다.▲ 사광을 받아 빛나는 백운대 주변 풍광이 정말 아름다웠다.▲ (18:50) 밝은 시간대에 하루재를 통과하여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요즘 일몰 시각은 19시 15분 전후다.▲ 위 그림의 피치 구분은 지금과 다르다. 빨간색 선으로 표시된 '시인 신동엽길'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기 위한 용도로만 참고하면 된다.▲ 오늘 우리가 등반한 모든 피치의 개념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