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 약속이 없는 토요일 아침은 여유롭다. 몸과 마음이 모두 늘어지기 마련이다. 자칫하면 집안에서 밍기적거리다 하루를 허비할 듯하여 무작정 집을 나선다. 항상 그렇듯 문턱을 넘기가 힘들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화사한 봄볕이 반겨준다. 오후엔 섭씨 20도를 웃돌고, 내일은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다. 생기를 얻은 나의 가벼운 발걸음은 칼바위 정상부의 테라스까지 쉼 없이 이어진다. 더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나만의 쉼터가 지극히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소유(所有)만 있고, 향유(享有)는 없다"라는 문구가 뇌리를 스친다. 현대인의 소비 행태를 풍자한 말이다. 집에서 두 시간 남짓의 등산을 해야만 닿을 수 있는 이 쉼터는 내것이 아니기에 소유는 없다. 향유만 있을 뿐이다. 테라스에 앉아 누리는 이 향유는 소박하지만 내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해준다.
정릉골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끌려 보국문에서 정릉골로 천천히 하산한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노랑제비꽃이 만발할 때 이 길을 거슬러 오르던 때가 떠오른다. 아직은 시절이 이른 모양이다. 주변 어느 곳에서도 들꽃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계곡물에서는 봄기운이 물씬 풍긴다. 버들치들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정릉천변을 걷다가 전철을 타고 혜화동으로 이동하여 낙산의 성벽길을 오른다. 비로소 봄이 보인다. 막 피어난 연초록의 여리여리한 이파리들과 바닥에 엎드려 초록빛을 넓혀가는 들풀이 반갑다. 산책로 주변에 만개한 노오란 산수유꽃을 발견할 때마다 눈은 더욱 즐거워진다. 동대문에서 청계천변을 걷다가 성북천으로 꺽어진다. 젊은 날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학가 주변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남다르다. 산하를 길게 걸으며 몸과 마음으로 봄을 만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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