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가을을 거치지 않고 겨울로 직행하는 듯하다. 갑작스러운 기온 강하로 몸이 움츠러들고 허리통증까지 재발하여 지난 한 주간이 몹시 힘겨웠다. 등반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그저 양지바른 한적한 곳에서 쉬엄쉬엄 게으른 등반이나 하고 싶었다. 아침 햇살이 암벽에 비추면 강촌의 유선대 암장은 환하게 빛난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 햇볕에 찜질한다는 기분으로 등반하면 자연스레 몸이 치유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침 나절에 도착한 강촌은 짙은 안개에 갇혀 있었다. 햇볕이 없으니 체감 온도는 기대와 달리 쌀쌀했다. 하는 수 없이 안개가 걷히고 따스한 햇볕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을 두어 시간 동안 산책하고 강선사로 돌아오니 갑갑한 안개는 어느덧 사라지고 반가운 햇살이 쨍하게 비춰주어 주변이 밝아졌다. 덩달아 내 기분도 고조되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유선대 암장을 향해 올라갔다.
하루종일 우리팀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던 고요한 유선대 암장이 오늘따라 유난히 평온해 보였다. 베이스캠프 앞의 '101동(5.10a)'에서 몸을 푸는데 허리통증을 의식해서 그런지 역시나 동작이 굼떴다. 그래도 바위는 차갑지 않았고 홀드를 잡는 손가락의 감각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일레븐대 루트 중 첫 완등의 기쁨을 주었던 '시동(5.11b)'은 재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은 홀드에 적응한다는 생각으로 붙었다. 몸이 무거워 크럭스 부분을 한 번에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괜찮은 기분으로 로프를 건 후에 톱로핑으로 한 차례 더 연습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펼쳐지니 오랜만에 정상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보약 같은 가을 햇볕을 아낌없이 받으며 '그리움길' 3피치를 통해 정상에 올랐다. 모든 시름은 다 날아가고 여기저기 아팠던 몸도 치유되는 듯했다.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하강하여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서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코난발가락(5.11a)' 루트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코난발가락'은 난이도 5.11a에 등반길이 20여 미터로 페이스와 크랙이 혼재된 형태인데, 루트 전체가 활처럼 휘어져 있다. 우측 칸테 아래의 크랙을 적절히 잘 활용해야 하고 다양한 동작이 요구되어 등반의 재미가 쏠쏠한 바윗길이다. 정확히 4주 전에 처음 프로젝트 등반 대상으로 생각하여 루트를 읽는 것과 크럭스를 통과하는 동작은 얼추 해결해 놓은 상태였지만 스스로 흡족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늘도 역시나 처음 붙었을 때는 볼트 간격이 길어서 추락에 대한 공포가 심한 두 번째 크럭스를 돌파하지 못했다. 페이스 부분의 홀드에 왼발을 먼저 올려 놓고 오른발을 칸테 아래의 홀드에 높이 올린 후, 왼손은 페이스의 아주 작고 날카로운 홀드를 잡고 오른손은 칸테 아래의 작은 홈에 넣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왼발을 페이스에 올려서 찍으면 크럭스를 통과할 수 있다. 이 동작의 시퀀스를 다시 확실하게 익히고, 톱로핑 상태에서 연속 동작으로 두 차례 더 완등한 후에 레드포인트 등반에 도전했다.
첫 번째 레드포인트 도전에서는 크럭스 두 곳을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동작으로 아주 간결하게 잘 통과했다. 그 순간 완등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으나 톱앵커 직전의 마지막 크럭스에서 머뭇거리는 바람에 행도깅을 하고 말았다. 톱로핑 상태로 힘이 있을 때는 왼발을 확실하게 찍고 오른발을 올려 딛은 후에 다음 홀드를 잡는 과감한 동작이 됐었는데 리드 등반 시에는 추락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등반파트너인 은경이가 알려준 미세한 발홀드를 하나 더 거쳐서 가니 동작이 한층 더 안정적이었다. 은경이는 내 다음 차례에 멋진 동작으로 가뿐하게 '코난발가락' 완등에 성공했다. 빌레이를 보면서 악우의 성공을 기뻐해주는 하이파이브를 나눈 후에 나도 그 기운을 이어 받아 곧바로 완등할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리 둘만의 노력으로 루트를 읽고 홀드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맞는 동작을 하나 하나 익혀온 과정이 의미 있었던 때문인지 '코난발가락'을 완등한 직후에 찾아든 희열은 정말 남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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