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강촌 유선대 암장 '시동(5.11b)' 레드포인트 완등 - 2021년 9월 11일(토)

빌레이 2021. 9. 12. 05:01

하드프리 암장에서 나의 첫 5.11대 프로젝트 등반을 어떤 곳에서 하는 게 좋을까?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익숙해서 마음 편하고 자주 갈 수 있는 강촌 유선대암장의 '코난발가락(5.11a)'이나 '시동(5.11b)' 중 하나를 완등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의 등반지를 유선대암장으로 정하기는 했으나, 정작 프로젝트 등반을 위한 준비는 순조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개강 이후의 온라인강의 녹화와 연구과제 세미나 등이 꽉 짜여진 일정으로 주중 업무량이 평소보다 많았다. 지난 화요일에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받았던 터라 실내암장에서의 운동량도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예방접종 후에는 경미한 몸살 증세가 나타나 힘겨워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5.11대 난이도의 루트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팀이 제일 먼저 도착한 유선대 암장에서 베이스캠프 바로 앞의 중앙벽에 있는 '시동(5.11b)' 루트를 올려다 보았다. 수 년 전, 이 암장을 처음 찾아 왔을 때 '시동'에 톱로핑으로 붙어봤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때는 둘째 볼트 위까지도 올라서지 못하고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후퇴해야 했었다. 오목하게 패인 오버행 벽에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홀드를 거의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루트를 누가 완등할 수 있을까?'란 의문을 품은 채 '시동'은 나와 상관 없는 영역의 바윗길로 치부해 버렸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유선대 암장에서 등반했지만 '시동'엔 아예 붙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미 내 눈동자는 미세한 홀드를 탐색하면서 볼트를 따라 루트를 훑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코난발가락(5.11a)'은 제쳐 두고 오늘은 '시동(5.11b)'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처음으로 일레븐대 루트의 완등을 위해 발동을 건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뜻의 '시동'이란 루트 명칭도 마음에 쏙 들었다. 

 

중앙벽의 두 개 루트에서 먼저 몸을 푼 후에 톱로핑으로 붙어본 '시동'은 예전과 달리 몇 차례 도전하면 완등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한 마디가 걸리는 작은 홀드들은 손에 달라 붙는 듯했고, 밋밋하게 흐르는 홀드들도 자세를 잘 취하면서 눌러주니 제압할만 했다. 문제는 마지막 볼트에 클립하는 자세와 톱앵커에 올라서는 동작이 확실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등반 파트너인 은경이가 나 다음으로 '시동'에 붙어 있는 동안 우리 뒤에 도착한 팀의 베테랑 클라이머께서 크럭스를 돌파하는 동작을 알려주셨다. 그 훈수를 귀에 담은 은경이는 마지막 볼트에 클립한 후 우측으로 이동하여 왼손 언더크랙을 잡고 오른발 아웃사이드 스텝으로 과감하게 일어서서 탑앵커 우측의 마지막 홀드를 잡는 자세를 기어이 완성하고 내려왔다. 오전의 프로젝트 등반은 여기까지만 하고 일단 중앙벽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다른 팀이 '시동' 루트에서 자유롭게 등반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배려였다. 아직은 완전치 않은 몸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는 우벽에서 30미터 가까이 되는 긴 루트인 '그리움(5.10c)'길을 두 차례 오르는 것으로 오전 등반을 마쳤다.

 

점심 이후엔 한적한 좌벽에서 세 개 루트를 등반하는 것으로 소화와 컨디션 조절을 위한 운동을 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중앙벽에서 등반하던 팀이 오후 3시 경에 모두 철수하니 암장엔 우리팀만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동' 루트 완등을 위한 시동을 힘차게 걸었다. 처음 도전했을 땐 크럭스에서 보기 좋게 추락했다. 그래도 후퇴하지 않고 나머지 자세를 완성해 나갔다. 언더홀드를 잡고 일어서서 몸을 던지는 마지막 동작도 자신있게 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추락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어서 동작이 과감해졌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내려와서 은경이의 톱로핑 빌레이를 본 후에 얼마 쉬지 않고 곧바로 완등에 도전했다. 마지막 볼트에 클립하고 우측으로 이동해서 왼손으로 언더홀드를 잡고 오른발 아웃사이드 동작으로 일어나려고 하는데 완력이 부족했다. 순간적으로 다시 오른발을 늘어뜨리면서 가로 밴드의 홀드를 오른손으로 누르고 왼손을 쉬는 동작을 취했다. 연습할 때는 한 번도 잡아보지 않았던 흐르는 홀드였지만 왼손을 털 수 있는 자세가 나왔다. 바로 그 순간에 한 번만 꾹 참고 몸을 던지면 완등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왼손으로 언더홀드를 확실히 올려잡고 오른발 아웃사이드 스텝을 취한 후 과감히 일어서서 오른손으로 마지막 홀드를 잡았던 동작은 이미 연습했던 것이었기에 오히려 싱거웠다. '시동'을 완등하고 톱앵커에 클립한 직후에 찾아든 기쁨은 일종의 전율이었다. 지난 주 거인암장에서 'JK(5.10d)'를 완등했던 것과는 또 다른 극강의 희열이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쾌락이었다. 나의 완등 직후에 빌레이 파트너인 은경이도 곧바로 '시동'을 사뿐히 완등하여 하이파이브를 나눈 우리의 기쁨과 환희는 더욱더 배가되었다.

 

어떤 루트의 등반 난이도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이 지금의 나에겐 없다. 그래서 중간 홀드가 깨져서 처음보다 난이도가 높아졌다고는 해도 두 등급 아래인 'JK(5.10d)'보다 '시동(5.11b)'을 더 쉽게 완등한 듯하여 조금은 혼란스러운 면도 있다. 하지만 등반에서 객관적인 난이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적인 암벽 등급이란 게 존재할 수도 없다. 그저 자유등반이 불가능해 보였던 루트를 수 년 간 노력하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인 끝에 완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욱 각별했다. 레드포인트 등반 방식에서 얻을 수 있는 도전과 꾸준한 노력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한 번 몸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첫 일레븐대 루트 완등이라는 열매를 나에게 안겨 준 '시동(5.11b)'은 앞으로도 절대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어려운 루트에 끊임 없이 도전하는 진정한 클라이머가 되고 싶은 의지의 불꽃에 시동을 거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 '시동(5.11b)' 루트를 올려다 보고 있는 순간 눈동자는 이미 홀드를 탐색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등반 동작을 그려보고 있었다.  
▲ '시동' 바로 좌측 루트인 '101동(5.10a)'에서 먼저 몸을 풀었다.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다.
▲ 다음으로 '시동' 바로 우측의 '102동(5.10b)' 루트를 등반한 후 '시동'의 톱앵커에 줄을 걸고 톱로핑으로 동작을 익혔다. 셋째 볼트와 넷째 볼트 사이의 실크랙에 암반수가 흘러내려서 물먹은 홀드를 잡아야 했다.
▲ 오전에 중앙벽은 다른 팀에게 양보하고 '시동' 루트의 프로젝트 등반은 오후로 미뤘다. 대신 우벽의 '그리움(5.10c)' 루트를 올랐다. 
▲ '그리움'길은 등반거리가 30미터에 가깝고, 오버행 턱을 넘어서는 구간이 세 차례 나오는 아주 재미 있는 루트이다.
▲ '그리움'길을 오르는 동안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따가웠지만 '시동' 루트의 암반수가 마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태양이 반가웠다. 
▲ '그리움'길을 선등한 후에 톱로핑으로 한 차례 더 등반하고 나니 비로소 몸에 활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 점심 직후엔 좌벽에서 가벼운 등반을 이어나갔다. '참나무(5.10a)' 루트를 오르고 있다.
▲ 좌벽의 '시월이 가기 전에(5.10a)' 루트를 오르고 있다.
▲ '시월이 가기 전에(5.10a)' 루트의 크럭스 구간인 오버행 세로 크랙을 넘어서는 동작은 난이도가 적어도 5.10b는 되는 듯했다.
▲ '수류화개(5.9)' 루트를 등반 중이다. 초반부의 페이스에서 발자리를 찾는 게 재미 있었다.
▲ '수류화개'는 처음으로 등반한 루트이다. 유선대 암장의 모든 루트를 올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른 팀이 모두 철수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시동(5.11b)' 루트의 프로젝트 등반에 시동을 걸었다. 첫 도전에서 마지막 볼트에 클립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톱앵커 직전에서 보기 좋게 추락했다. 상단 오버행 턱에서 언더홀드를 잡고 우측으로 이동해서 마지막 동작을 취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추락하면 펜듈럼을 쳐서 좌측 사선 턱에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추락해 보니 안전했다.
▲ 레드포인트 완등을 위해 필요할 듯하여 처음으로 가져온 브러쉬를 요긴하게 사용했다. 물기가 남아 있던 홀드를 닦아내는 데도 요긴했다.
▲ '시동' 루트의 출발점에 서서 완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비장한 자세가 보이는 듯하다. ㅎㅎ
▲ 예전엔 전혀 홀드로 보이지 않던 곳에 손과 발이 척척 움직인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마지막 동작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등에 성공한 순간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극강의 환희가 전율처럼 온몸으로 느껴졌다.
▲ 등반 파트너인 은경이도 곧바로 '시동' 완등에 성공했다. 친구의 완등 또한 내 일처럼 기뻤다. 함께 가면 더 즐겁고, 더 높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 보람찬 오늘 하루를 만끽하게 해준 유선대 암장을 개척해 주신 춘천 한빛산악회 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 하산길 내내 나도 모르게 실실 쪼개는 웃음기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의 등반도 오늘처럼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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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촌 유선대 암장 개념도

 

 

좌벽

샹그리라 가는길 : 샹그리라(=숨겨진 이상향)를 찾아가는 어느 등반가의 모습.

수류화개 :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 삼라만상 본연의 모습.

작은 언덕 : 고빗사위 구간에 작은 턱을 넘어서야 한다.

오르락 : 오름짓의 즐거움.

시월이 가기전에 : 을미년(2015) 10월의 마지막 날에 마무리하다.

참나무 : 코스가 끝나는 곳에 참나무가 있다.

벚꽃 피는 날 : 벚꽃이 활짝 핀날 이곳에 올라 아래 세상의 정취를 느끼다.

바다리 : 맹렬하게 달려드는 바다리벌과 정열적인 등반 초심자의 모습이 닮았다.

 

작은 벽

초심 : 암벽등반 입문 시절의 겸손함을 잊지말자.

101 : 백의 첫번째 코스.

시동 : 개척작업에 시동을 걸다(개척시작).

102 : 백의 두번째 코스.

 

큰벽

201 : 101동을 오르고 좀 아쉽다면 올라보라. 작은벽 2층에 있는 첫번째.

202 : 102동이 짧아 연속하여 오르는 재미를 더했다. 작은벽 2층에 있는 두번째.

코난발가락 : 엄지발가락에 힘을 꽉 줘야 산다(만화영화 “코난”에 나오는 장면).

EMPTY : 천공작업중 오일이 바닥나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그리움 : 지난날 등반하던 추억들과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피어 올랐다.

프리텐션(Pre-tention) : 미리 긴장을 가하다.

HANBIT : 크고 넓은 마음으로 하나되어 순수하고 참된 산악인을 상징한다.

하늘문 : 하늘에 닿을 듯 정상으로 향하다.

 

우벽

통천문 : 하늘과 통하는 문(오를수록 하늘이 넓게 펼쳐진다).

잔트가르 : 몽골어로 “최강의 사내”를 의미한다.

챙이올 : 내가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처음 시작할 당시를 잊지 말자).

선녀문 : 달밤에 보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 올 듯 신비스럽다.

바람개비 : 시원한 바람이 불면 하염없이 돌아가는 바람개비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