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창해일속(滄海一粟)

빌레이 2020. 10. 18. 11:01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시장기만 속여 두오."라는 문구는 너무나 강렬해서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김소운(金素雲) 선생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에서 어느 신혼부부의 일화에 등장하는 글이다. 아주 간결하고 짧은 글 속에 인간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김소운 선생의 글은 시대를 불문하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아, 나도 저렇게 진솔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란 생각이 저절로 찾아든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애석하게도 출판된 책이 드문 관계로 선생의 글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오래 전부터 소장하고 있는 2천 원짜리 문고판인 <가난한 날의 행복>은 요즘도 가끔 펼쳐보게 된다.

 

문고판 책 속의 여러 수필들 중에서 오늘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란 제목의 글이 문득 떠올라서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수필은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리를 잃게 된 병사가 다리를 자르는 대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안타까운 일화를 다루고 있다. 산악인이었던 이 병사에게는 산에 가지 못하는 삶은 의미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김소운 선생은 이러한 삶의 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을 단호히 피력한다. 나도 선생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의 존재가 큰 바다 속의 좁쌀 한 톨처럼 지극히 작은 존재라는 '창해일속(滄海一粟)'의 뜻을 단순히 허무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는 의견이다.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건 있을 수 없다. 눈앞의 상황이 자신에게 절망적이라는 이유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오만하고도 비겁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숨진 등반가들의 죽음은 이 수필 속의 죽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무작정 행복을 쫒는 삶보다는 역경을 이겨낸 후에 비로소 찾아드는 진한 행복감과 더 나은 삶의 가치를 인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이 암울하고 답답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녀도 될만큼 작은 1997년에 발행된 2천 원 짜리 이 문고판은 내가 애지중지하는 소장품이다.
▲ '창해일속'은 등산가를 다룬 김소운 선생의 글이라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 문고판으로 4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의 짧은 글이 진한 울림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