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동면의 오아시스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대슬랩을 한 피치로 올라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좌측 상부에서 대슬랩에 진입하여 70미터 자일 한 동으로 기범씨가 선등하고 내가 뒤따랐다. 첫 피치 확보점이 있는 턱을 넘어서서 완만한 부분은 동시등반 방식으로 진행함으로써 중간 피치 없이 빠르고 안전하게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아무리 평일인 수요일이라지만 평상시와 달리 주변에 우리 두 사람 외에는 등반자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서 이상할 정도였다. 어젯밤에 전해들은 지석형의 갑작스런 부상 소식에 황망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으나, 인간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 해답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지석형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고 등반에 집중하자는 기범씨의 의젓한 말에 새로운 힘을 얻었다.
'인수A'길 좌측에 있는 '민남(5.10c/d)'길에 기범씨가 줄을 거는 것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두세 차례의 추락이 있었지만 크럭스를 돌파한 후의 만족감이 큰 루트였다. 곧바로 하강하여 바로 왼쪽에 있는 '영(0)(5.10b)'길을 톱로핑 방식으로 올랐다. 상대적인 난이도 때문인지 '민남'길 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영'길을 하강하여 다시 한 번 '민남'길에 붙었을 때는 처음보다 익숙한 탓에 그런대로 괜찮게 올랐다.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오아시스의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서 기범씨표 냉커피를 곁들인 점심을 먹은 후에는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등반이 이어졌다.
'의대'길 두 피치를 한 번에 올라서서 궁형길과 인덕길 2피치 확보점에서 기범씨가 첫 마디를 끊었다. 후등으로 오른 나는 의대길 2피치 좌향 크랙 상단부에서 보기 좋게 추락을 먹었다. 별로 힘들지 않은 레이백 자세였는데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다. 벙어리 크랙 부분에서 썸다운(thumb down)과 썸업(thumb up) 핸드재밍(hand jamming)을 확실히 해야한다는 기범씨의 조언을 들으니 나의 추락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인수A'길과 '궁형'길 사이에 있는 '인덕'길 3피치 등반을 출발할 때, 기범씨는 특유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면서 "아마도 쫄깃할겁니다. 가보면 압니다"란 말을 남기고 초반부의 직벽을 올라 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한참만에 "완료"를 외친다.
몸이 낭떨어지로 떨어질듯한 크랙에서의 가슴 쫄린 긴장감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사선으로 진행하는 벙어리성 좌향 크랙이라고는 하지만 오른손 홀드가 없는 배불뚝이 바위에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동작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크랙에서 벗어나 안부로 살짝 점프해야 하는 동작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범씨가 옆에서 받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까지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덕'길은 마지막 4피치 슬랩까지 짭짤한 편이어서 지금까지 내가 등반했던 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루트로 남을 듯하다.
'인덕'길의 '인'자는 어질 인(仁)이 아닌 참을 인(忍)이 분명할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얼굴이 바위 표면에 닿을 정도로 몸을 붙여서 정말 어쩡쩡한 자세로 '인덕'길 크랙을 조금씩 전진할 때마다 기범씨가 옆에서 해준 말은 "형, 이겨내야 돼, 극복해내야지!"였다. 수술 이후의 힘든 재활 기간이 기다리고 있을 지석형에게 지금 이 순간 기범씨의 그 말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 지석형이 강한 정신력으로 지금의 난관을 잘 극복하여 하루 빨리 부상을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금 함께 줄을 묶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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