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불곡산 독립봉 암장 - 2020년 5월 2일

빌레이 2020. 5. 2. 22:06

산과 자연은 인간이 정복하거나 통제할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불곡산의 독립봉 암벽에 붙어서 낑낑댈 수 밖에 없었던 순간의 무력감은 자연 암벽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지난 4월 15일의 국회의원 선거날에 처음으로 등반했던 독립봉 암벽을 불과 보름만에 다시 찾았건만 오늘의 바위 상태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처음 왔을 때 톱로핑 방식으로 즐겁게 연습하듯 등반했던 '샘내(5.10a, 18m)' 루트에 줄을 걸기 위해 올라가는 기범씨의 동작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바윗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암벽 표면을 적시고 있어서 홀드의 상태가 엉망이라고 했다. 오히려 고난도 루트를 오를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기범씨는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범씨의 선등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 긴장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후등으로 오른 내가 실제로 붙어보니 '샘내'길은 일레븐급 이상의 고난도 루트처럼 느껴졌다. 건조한 상태에서는 손가락 끝에 확실히 힘을 실을 수 있었던 홀드들이 물에 젖어 있으니 여간 미끌리는 게 아니었다. 양호한 손홀드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그리 유쾌할 수 없는 몸풀기 등반을 마치고 내려와 보니 바지가 약간 젖어 있었다. 잔뜩 찌뿌린 하늘과 습기를 가득 품은 대기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간밤에 약한 이슬비 정도는 독립봉 주변에 뿌려졌을 듯하다. 기범씨, 지석형, 은경, 나, 이렇게 4명으로 짜여진 오늘의 등반팀은 독립봉 암벽에서의 등반을 오후로 미루고 바람 잘 통하는 슬랩을 먼저 오르기로 했다. 발가락이 아파도 물 흐르지 않고 뽀송뽀송한 슬랩에서의 등반은 한결 나은 편이었다.

 

독립봉 암벽의 크랙 사이로 암반수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축축한 벽 상태는 오후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등반하기에 그리 녹록치 않은 환경이었지만, 우리의 희망인 기범씨가 줄을 걸어주니 열심히 매달릴 수 있었다. '소녀시대(10a,16m)', '알밤(10b.c,17m)', '달빛(10b,15m)', '맥주(10a,15m)' 루트를 차례로 등반했다. 기범씨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거북(12c,23m)' 루트에 붙어서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냈다. 인공암벽에서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변화무쌍하고 불편한 자연 환경에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애초에 마음 먹은 등반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는 보람찬 하루였다. 지금 이 순간 "곤란은 극복하고, 위험은 피하라"는 어느 알파인 등반가의 지혜로운 말이 떠오른다.                   

 

 

▲ 어느 정도 바위 표면의 물기가 가신 늦은 오후 시간에 기범씨가 '달빛(5.10b)' 루트를 오르고 있다.

 

 

▲ 오전 시간에 바윗틈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악조건 속에서 기범씨가 '샘내(5.10a)'를 등반 중이다.

거침없이 오르던 보통 때의 모습이 아닌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동작이었다.

 

 

▲ 사진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젖어 있는 암벽의 표면이 살얼음판 같았다. 

 

 

▲ 지석형이 '샘내'길을 톱로핑으로 오르는데... 지난 번과 달리 여간 힘겨워하는 게 아니었다.

 

 

▲ 오전 시간엔 슬랩에 붙는 것으로 결정하고... 지난 번에 등반하지 않았던 좌측 길을 등반했다.

 

 

▲ 두 마디로 되어 있는 슬랩 좌측 길의 둘째 피치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힘든 페이스였다... 나는 볼트따기로 올랐다.  

 

 

▲ 슬랩 첫 피치 확보점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어느새 숲의 초록빛이 많이 짙어졌다.

 

 

▲ 분홍빛 진달래꽃이 만발하던 독립봉 암벽 주변은 불과 보름 사이에 신록의 푸르름으로 가득 채워졌다.

 

 

▲ 좌측 슬랩 둘째 피치의 후반부를 라스트로 오르고 있다.

 

 

▲ 오후 시간엔 '소녀시대(5.10a)'를 시작으로 다시 독립봉 암벽에서 등반했다.

 

 

▲ 기범씨가 '소녀시대'를 등반 중이다... 소녀의 치맛자락을 붙잡는 듯한 자세로...ㅎㅎ

 

 

▲ 루트 초반부는 물기가 가득해서 스태밍 자세를 확실히 취해야 했던 '소녀시대'였다.

우리가 등반했던 또다른 루트인 '알밤(5.10b~c)'은 '소녀시대' 바로 우측에 있다.

 

 

▲ 기범씨와 아는 사이인 두 자일파티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 사이라고...

 

 

▲ '달빛(5.10b)' 루트를 출발하기 위해 준비 중인 기범씨, 빌레이어 지석형, 감독관(?) 포스의 은경...ㅎㅎ... 오늘의 자일파티...

 

 

▲ 초반부의 페이스와 후반부의 디에드르 크랙으로 구성된 '달빛' 루트를 오르고 있는 기범씨.

 

 

▲ 책을 반쯤 펼쳐 놓은 모양의 디에드르 크랙에서는 과감한 스태밍 동작이 안정적임을 몸으로 보여주는 기범씨의 등반 모습. 

 

 

▲ '달빛' 상단부 테라스에서의 고도감과 조망이 일품이라는 기범씨의 말을 기억하고,

 나도 저곳에서 전망을 핑계 삼아 잠시 쉬었던 기억이...ㅎㅎ.

테라스에서 까치발로 일어서서 간신히 바윗턱을 잡았던 순간이 짜릿했다.

 

 

▲ '달빛' 루트를 등반 중인 은경과 빌레이 중인 지석형.

 

 

▲ 기범씨는 '거북(5.12c)' 루트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