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정기적으로 받는 월급 외에 추가로 받았던 인센티브 성격의 돈을 꾸준히 따로 모아 두었다. 십년 이상을 적립하니 제법 큰 돈이 쌓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 규모의 돈이 모아질 때마다 은행의 목돈굴리기 상품을 이용했지만 문득 금리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증권회사의 주식형 펀드에 투자하기로 했다. 크나큰 이익을 바라고 한 건 아니다. 나름대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금융에 대해서 내가 너무 무지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일차적 요인이다. 대학 졸업반인 아들녀석이 금융권에 취업하기를 희망한 뒤로 식탁에서 나누는 우리 부자지간의 대화는 경제와 경영, 금융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창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아들의 설명을 듣다보면 내가 자본주의 경제 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은행 이자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을 올리기만 하면 성공이라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우선 일년만 투자해 보기로 결정했다.
내가 가진 목돈의 일부는 아들에게 위탁하여 굴려줄 것을 부탁했다. 책이나 강의를 통한 이론적인 공부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양한 형태의 투자를 감행하면서 실물 경제를 아들녀석이 몸소 체험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나의 의도가 깔린 선택이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요즈음 한국의 주식시장은 곤두박질 치고 전반적인 경제 사정도 매우 나빠졌다. 당연히 내가 투자한 펀드는 상당히 많은 금액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아들이 직접 투자하고 있는 분야는 그나마 선방 중인 듯했다. 그동안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주가가 급락세로 돌아선 올해 하반기부터는 증권회사 담당직원으로부터 전화도 자주 오고, 나 스스로 자연스레 인터넷으로 펀드잔고를 확인하는 일이 잦아졌다.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일과인 강의 준비와 연구 업무에 특별히 게을러진 부분은 없었으나 나의 계좌에서 계속 피 같은 돈이 빠져나간다는 불길한 생각이 하루종일 나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큰 봉변을 당한 후에 갈팡질팡 하는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노력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은 무력감으로 인식되어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면 암 같은 중병에 걸릴 수도 있겠지 싶었다.
어느 순간 돈을 지키려다 돈보다 더 소중한 많은 것들을 쉽게 잃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가가 여전히 하락세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손절을 결정하여 모든 펀드를 매도해버렸다. 나의 첫 펀드 투자는 보기 좋게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돌아서야 했던 것이다. 불로소득을 바라는 탐욕이 내 마음을 흔든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큰 돈을 손해보고 말았다. 마음이 아프고 정신적으로 약간은 피폐해진 상태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원망할 마음은 없다. 항상 그렇듯 내게 닥친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상기하기로 했다. "왜 내게만 이런 불행이 찾아올까?"라는 쓸모 없는 질문은 빨리 떨쳐버리기로 한다. 오히려 나의 탐심을 늦게나마 깨닫게 해준 것에 감사하기로 마음 먹는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나의 마음을 잘 어루만져 준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돈을 탕진한다면서 이 정도 돈을 잃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고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아들녀석도 펀드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다는 문자를 날려주는 것으로 나를 위로해준다. 어느덧 성큼 성장한 아들의 마음씀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어려울 때 울타리가 돼 주는 것은 역시 가족이라는 사실을 모처럼 깨닫게 되었다.
돈에 대한 탐심에는 다른 소중한 많은 것들을 쉽게 지배하고 구속하는 나쁜 힘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펀드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시간 동안은 무엇에 홀린 듯한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 돌이켜 보면 평소 내가 바라는 삶의 태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직장 생활하면서 보수나 돈을 먼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그저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유함을 느끼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내 마음 밑바닥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학문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펀드 때문에 신경썼던 기간에는 의무적으로 일에 매달렸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내 앞의 일을 의무감만으로 감당할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는 없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재미 없어질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라도 앞으로는 돈에 대한 탐심은 버려야 하겠다. 마음의 평안을 최고의 재산으로 삼았던 존 러스킨의 삶이 떠오른다. 인도주의적 경제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러스킨의 책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 나오는 글귀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의 삶에 있어서 돈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가다듬어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의 본보기는 세상에서의 출세 여부는 하늘에 맡긴 채, 자기는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더 많은 부보다는 더 소박한 쾌락을, 더 높은 지위보다는 더 깊은 행복을 추구하기로 마음먹고,
마음의 평정을 제일 중요한 재산으로 삼아,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무해한 자부심과 평온한 추구에서 명예심을 느끼는 사람들인 것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
▲ 2016년 7월, 몽블랑이 보이는 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러스킨바위에서..... 존 러스킨 선생의 위대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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