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미천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좀 더 좋은 강의와 세미나를 위해 준비하고, 수학 관련 연구에 몰두할 때 지금도 일상 속에서 가장 큰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수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수학을 공부하다 보면 언제나 어려운 관문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를 극복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의 크기는 힘들게 노력했던 시간에 정비례 해서 찾아 오는 듯하다. 수학의 정직성과 솔직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속성이 나는 마음에 든다. 수학은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분야인 클라이밍의 세계와 너무나 닮아 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조심스럽게 진행해서 목표점에 도달하고 싶지만 어느 한 순간 삐끗해서 추락하면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수학과 클라이밍은 어찌보면 가혹하리만치 솔직하고 정직한 것만 허락한다.
수학이 직업인 까닭에 수학 관련 교양 서적은 오히려 잘 읽지 않게 된다. 너무 얕은 지식을 기반으로 추상수학을 설명할 때 범할 수 있는 오류가 상당하고 이를 발견하게 되면 심기가 불편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내가 여가 시간에 읽는 책의 종류는 일반 교양이나 문학 서적이 주류를 이룬다. 근자엔 산서와 여행에세이 등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문학은 어느 순간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읽고난 후의 감흥이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서 턱없이 떨어진 탓이다. 우리의 출판 현실이 너무 경박스러워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서양 소설은 여전히 명작의 품위를 지키고 있는 새로운 작품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비록 번역서이기는 하나 수학 관련 교양 서적도 예전과 달리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한다. 부분적인 오류에 집착하지 않고 책 전체의 구성이나 내용을 보면 꽤 괜찮은 책들이 많이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책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많이 너그러워진 듯하다. 오랜만에 명작의 향기가 묻어나는 <수학자의 낙원>을 만난 것도 관대해진 태도와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의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논한다. 수학 이외의 학문은 넓게 보면 좋고 나쁨을 논하는 범주에 속한다. 수학은 공리론적 체계 안에서 직관적 사실을 옳은 것으로 약속하고, 이를 바탕으로 엄밀한 논리 체계 안에서 새롭고 유용한 사실들을 이끌어 낸다. 현대 수학이 지금처럼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에 다져진 현대 수학의 토대는 무한집합론의 창시자인 게오르그 칸토어(Georg Cantor, 1845 ~ 1918)의 혁명적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위대한 수학자 칸토어를 주인공인 한스 징거의 모델로 삼은 소설이 바로 <수학자의 낙원>이다. 수학자인 한스 징거 교수와 철도기관사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프랑스인 병사 마티아스가 독일의 한 정신병동에서 우연히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고, 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의 내용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프랑스어판의 원제인 <Villa des Hommes(남자들의 방)>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솔직한 제목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출판 시장을 감안한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수학자 힐베르트가 한 말인 "칸토어가 우리를 위해 만든 낙원에서 우리가 쫓겨나서는 안 된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는 동안 개인적으로 유익한 점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위대한 수학자 힐베르트의 전기에서 느꼈던 감흥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그동안 수학을 배우고 익히면서 책이나 논문 속에서 만났던 기라성 같은 수학자들의 실명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저자가 수학교수인 까닭에 칸토어를 징거로 바꾼 것 외에는 모든 수학자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부분이 좋았다. 일반인들에게는 어차피 낯선 이름이겠지만 수학 전공자들에게는 아는 사람을 책 속에서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을 전해 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두 수학자였던 칸토어와 데데킨트 간에 오간 학술적 편지와 그들의 진한 학자적 우정을 그린 부분은 특별히 감동적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던 점도 유익했다. 소설책임에도 한줄 한줄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구절 몇 개를 여기에 옮겨본다.
"촉망받던 인재가 소소한 난관에 굴복하여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용기를 잃고 완전히 위축되어 기껏해야 훗날 '망가진 천재'로 추억될 뿐이란다."
주인공 징거가 평생 간직했던 아버지의 편지. 기숙학교에서 열여섯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받은 것이라고.
"난 수학자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거든. 하지만 내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지 사람들이 바라는 내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네."
주인공 징거의 대사. 위대한 수학자다운 진실성이 엿보이는 부분.
"아프트식 열차는 첩첩산중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역에서 정차했지. 승객들은 눈밭에 내렸고, 공기는 청명했으며, 햇살은 노곤하니 비추고 있었어. 끝없이 펼쳐진 눈밭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 둘은 통성명을 했지.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한스 징거. 우리 둘은 한목소리로 외쳤어. '세상에, 설마!' 우리 둘 다 상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런데 바로 그 데데킨트라니!...... 바로 그 징거라니!....."
징거와 데데킨트의 첫 만남은 스위스 알프스의 등산열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독일 수학자들은 산을 사랑해. 사람을 도취시키는 정상의 공기가 그들 두뇌의 회백질을 살살 부추기는 게 틀림없어."
수학자들이 산을 좋아한다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프랑스어는 정말 음악적인 언어야!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 프랑스가 위대한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거야. 독일은 정반대지. 독일어는 아주 거칠어서 말의 투박함을 상쇄하기 위해 음악가들이 쏟아져 나온다네. 창조를 부추기는 건 바로 결핍이거든."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문학, 독일의 음악"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이유를 언어에서 찾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다.'라고 천명했던 징거 씨로서는 감동할 수 밖에 없는 기획이었다. 그는 일찌기 말하지 않았던가. '수학은 그 발전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고 단 하나의 제약 밖에 없다. 수학적 개념들이 그 자체로 모순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제약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연구에서 이 자유를 경험했고, 그가 만들어낸 수학적 대상들에는 눈부신 비전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수학의 발전을 종종 옭아매곤 하는 학계의 압박과 금지를 단연 뛰어 넘은 비전이었다."
내가 평소 생각하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대목이라서 눈길을 끌었다.
"파리 대회에는 실제로 참석하지 않았지. 나의 영광을 기리던 그 대회에는 불참했어. 반면에 치욕을 입은 하이델베르크 대회에는 분명히 참석했네. 행복의 길을 피해 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지."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세속적으로는 고호처럼 불행한 경우가 많다. 칸토어의 삶도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Georg Cantor (1845 ~ 1918)
이미지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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