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는 새벽녘에 집을 나선다. 아침 7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을 달려 철원의 고석정 주차장에 도착한다. 예전보다 도로 사정이 정말 좋아져서 철원이 이제는 먼 거리로 느껴지지 않는다. 20여 년 전 우리집 애들이 꼬마였을 때 놀러온 기억이 있는 고석정이다. 그때보다는 놀랄 정도로 주변이 변했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여름철의 한탄강 래프팅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멋진 펜션들이 즐비하다. 겨울철에는 얼음 트레킹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주차장에서 곧바로 한탄강 협곡에 우뚝 서있는 고석으로 내려간다. 드넓은 철원평야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탄강은 여느 강과는 달리 화산폭발로 형성된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인공적인 구조물에나 어울리는 수사다. 강 한가운데 우뚝 선 고석의 아름다운 풍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적어도 수천 년은 흘러야 풍화와 침식 작용 등에 의한 자연의 변화는 관찰 가능할 것이다. 기상청 예보로는 영하 10도 내외의 추운 날씨라고 하지만 햇살이 가득하여 몸으로 느끼는 온도는 봄날 같다. 고석정 주변의 얼음도 많이 녹아 있다. 하류 방향인 순담계곡 쪽은 가장자리의 얼음이 녹아 있어 걸어서 들어가기에는 위험해 보인다.
상류 방향으로의 트레킹을 시작한다. 안전한 얼음 트레킹을 위해서 물살이 센 곳에는 군데군데 섶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강기슭 위로 자작나무 숲이 펼쳐지고 얼어붙은 강물 위로 하얀 눈이 쌓여 운동장처럼 드넓은 얼음판 위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잠시 쉬어간다. 바람이 거의 없고 햇빛 찬란하니 춥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대로 앉아서 얼음에 구멍 뚫고 강태공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석정부터 직탕폭포까지의 왕복 트레킹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이어서 오래 쉬지는 못하고 다시금 길을 나선다. 우리는 강태공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나그네인 것이다.
강물이 굽어 흐르는 모퉁이를 돌아나가자 승일교가 눈앞에 펼쳐진다. 산길을 걷는 것과 달리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트레킹 코스여서 진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승일교 부근의 절벽엔 빙벽등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얼어있고 주변엔 축제 이후의 잔해들이 뒹굴고 있다. 얼음 트레킹을 위해서 찾은 곳이지만 안전한 트레킹을 위해서 잘 정비된 강기슭의 오솔길을 걸을 때의 기분이 오히려 더 상쾌하다. 여울목에서는 힘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물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가끔씩 쩡쩡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릴 때는 깜짝깜짝 놀래기도 한다.
절벽에 현무암질의 주상절리가 보이기 시작한 곳부터의 풍광이 으뜸이다. 한여울길로 이름 지어진 둘레길 위의 출렁다리를 건너서 올라선 전망대 위에서의 조망이 시원하다. 멀리서 하얀 눈으로 정상부를 장식한 금학산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철원평야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아찔한 절벽 아래로는 제주도에 가서나 볼 수 있는 검은 현무암과 주상절리대가 협곡을 이루는 절경의 한탄강이 하얗게 얼어 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구경 나온 주말 나들이객들이 얼음 위를 거닐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우리들도 다시 강으로 내려가서 이채로운 주상절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지하로 스며든 물줄기가 절벽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빙폭을 이룬 곳도 있다. 빙폭 위에서 침식에 의해 형성되었을 자연의 구름다리가 특별히 멋지게 보인다.
강물이 얼어 있을 때만 걸어서 근접할 수 있는 주상절리대를 충분히 구경하고 강기슭의 평탄한 곳으로 올라선다. 때마침 풍광 좋은 곳에 마련된 사각형의 돌벤치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는다. 이 순간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주상절리대에서 태봉대교로 가는 길에서는 잠시 길을 잘못 들어 거친 수풀을 헤쳐나가야 했지만 이마저도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산에서와는 달리 강둑으로 올라서기만 하면 쉽사리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여울길을 따라서 상사리 마을 앞까지 갔다가 직탕폭포로 되돌아오는 과정도 처음엔 길을 잘못 들었다며 되돌아 설까 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봄 기운이 물씬 풍기는 들판을 걷는 것 또한 마음에 들어서 좋았다.
직탕폭포는 넓게 펼쳐진 모습도 이채롭지만 바로 앞에서 경쾌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의 생동감이 더욱 더 인상적이다. 직탕폭포부터 고석정으로 돌아오는 길은 자전거도로와 도보길이 같이 가는 포장된 길을 따라서 걷는다. 인적이 거의 없는 그 길에서 스마트폰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음악을 들으며 마실 나온 것처럼 편하게 걷노라니 피로감은 어느새 사라진다. 얼음으로 덮인 강을 트레킹할 때는 겨울이 느껴졌었지만 포장된 산책로 위를 걸을 때는 계절이 바뀌어 따뜻한 봄을 맞이한 듯했다. 더없이 행복했던 한탄강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왔다는 감사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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