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의 강추위다. 그동안 포근했던 겨울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마음도 날씨 따라 움츠러든다. 주말산행으로 가까운 둘레길이나 대충 돌고 올까 생각한다. 문득 날씨에 좌지우지 되어 나약해지는 내 모습이 싫어진다. 요즘 다시 보고 있는 산악 만화인 <신들의 봉우리>는 영하 20도 이하의 기온과 산소가 희박한 극한의 고산지대에서도 도전적인 등반을 감행하는 산악인들의 열정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거기에 비하면 이 얼마나 한심하고 태만한 작태인가? 혹한의 기상 상태에 대비한 등산 장비들은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 막상 추워지면 산에 오를 것을 주저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이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외치던 말이다. 한데 나 역시도 이제는 날씨를 핑계 삼아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이런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 서울보다 더 추울 것으로 예상되는 철원으로 향한다.
산정호수 안쪽에 있는 펜션단지를 지나 비포장 도로를 잠시 오르면 나타나는 고갯마루인 산안고개에 주차한다. 기온은 낮지만 햇살 가득한 쾌청한 날씨에 궁예능선의 우람한 절벽이 눈앞에 반짝이고 있다. 조금은 도전적인 산행을 하겠다는 생각에서 처음 가보는 루트를 구상한다. 산정호수에서 출발하여 명성산 주릉을 타고 산안고개로 하산하는 코스 중간에 잠시 들렀다가 온 적이 있는 궁예능선을 철원 방향에서 시작하여 완전하게 올라보기로 한다. 산행 출발점인 산안고개를 넘어서 철원 방향의 비포장 군사용 도로를 따라 강포3교까지 한참을 걸어간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곧바로 올라가면 궁예능선으로 들어가는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주변이 온통 공사장 같은 전차부대 훈련장이어서 등산로 초입을 발견하는 데 약간의 애를 먹는다. 강포3교에서 더 진행하여 군부대 철조망으로 막혀 있는 곳까지 간 다음 되돌아 왔던 것이다.
산행 지도와 표지판이 서있는 등산로 입구에서 따뜻한 커피와 빵으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간다. 산길 초입을 제대로 찾았다는 안도감과 찬란히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더없이 평화로운 휴식 시간이다. 궁예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오솔길이 낙엽에 덮여서 길을 가늠하기 어려울만 하면 나타나는 리본이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해준다. 그냥 오르기에 부담스러운 절벽에는 어김없이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이 코스를 따라 오른 사람의 최근 흔적은 거의 없다. 응달에 쌓인 눈에도 사람 발자국은 희미하다. 비교적 선명한 등로지만 나뭇가지를 헤치고 진행해야 할만큼 좁은 오솔길이 오지 산행을 방불케 한다.
강포저수지와 드넓은 철원평야가 한눈에 펼쳐지는 조망이 시원한 능선 상에 올라선 후에도 궁예봉 정상까지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소요된다. 장비 없이 동계 암릉 등반을 연습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등산로의 난이도는 높다. 하지만 어려운 산길을 집중해서 오르는 동안 강추위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춰서면 내 몸에서는 연기처럼 짙은 김이 피어오른다. 청정한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 군데군데 눈이 쌓인 등로를 암벽 등반에 가까운 동작으로 올라서서 맞이한 궁예봉 정상에서의 환희는 근래에 맛보지 못했던 감흥이다. 처음 올라본 궁예봉 정상의 나무로 된 하얀색 정상표시목이 정겹고 단아한 서체까지 멋스럽다. 산정호수에서부터 철원평야 일대와 그 너머로 펼쳐지는 북녘의 산줄기까지 일망무제의 조망을 선사하는 궁예봉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을 훌륭한 암봉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명한 하늘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아낌없이 부어주는 궁예봉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면서 편안한 점심시간을 갖는다. 산정호수 표면에 반사되는 오후의 햇살을 한껏 즐길 수 있는 테라스에서 후식으로 커피 한 잔까지 마시면서 느긋하게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만하면 최고의 강추위 대처법이라며 스스로를 대견스레 생각한다. 마냥 머물고 싶은 궁예봉 정상을 뒤로하고 궁예능선 산행을 이어간다. 궁예능선에는 네 개의 큰 암봉이 도열해 있다. 철원 방향에서 첫 번째 봉우리인 궁예봉을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바로 앞의 독립봉을 왼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는 길이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직벽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으나 중간 부분이 낡아서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응달이라서 눈까지 쌓여 있다. 위에서는 하강하는 것이 만만치 않아 보여 섣불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하지만 막상 첫발을 내딛고 돌아서서 뒤로 내려오니 나무 뿌리가 적절한 손홀드 역할을 해주어 실상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까다로운 구간을 내려서서 다음 봉우리에 올라선다. 궁예능선에서 가장 높은 870봉이다. 예전에 여기까지는 명성산 방향에서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는 익숙한 산길인 것이다. 870봉을 내려와서 또 하나의 암봉을 넘으면 산안고개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다. 약물계곡과 명성산 정상으로 갈라지는 안부이다.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골짜기 말미엔 산안폭포가 있다. 작년에 비해 얼어 있는 정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올 겨울이 지난 겨울보다는 확실히 따뜻하다는 방증이다. 애마가 기다리고 있는 산안고개에 도착해서 다시 한 번 궁예능선을 돌아본다. 처음 걸어본 산길이라서 신선함이 가득했던 산행이었다. 자칫하면 춥다고 움츠러들 뻔했던 주말에 조금이라도 도전적인 산행을 결행함으로써 기억에 남을만큼 만족감 높았던 궁예능선 암릉 등반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겨울에 험한 암릉이 있는 구간을 가고자 할 때는 피켈과 보조자일 정도를 준비하면 한층 더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라는 교훈도 얻었다.
1. 궁예봉 정상의 조망 좋은 테라스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커피 한 잔 마시는 그 순간의 행복감은 오래 남을 것이다.
2. 산행 출발점인 산안고개에서 올려다본 궁예봉.
3. 산안고개에서 군용도로를 따라서 철원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뒤돌아본 산안고개.
4. 강포3교를 건너지 않고 곧장 궁예봉 방향으로 올라가면 등로 초입이 나온다.
5. 억새가 많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등로 초입이다.
6. 산에 들어가서 얼마 오르지 않으면 나타나는 폭포 위에 이정표가 있다.
7. 궁예봉으로 향하는 등로는 가파른 바윗길이다.
8. 시야가 열리는 능선길에서의 조망. 강포저수지와 철원평야가 잘 보인다.
9. 우측의 산은 동송읍에서 가까운 금학산인 듯하다. 금학산에서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도 언젠가는 타볼 생각이다.
10. 궁예봉 정상의 표지목. 단아한 한자 서체도 멋스럽다.
11. 궁예봉 정상에서 바라본 산정호수 방향의 조망.
12. 궁예봉 정상에서는 사방의 산줄기가 잘 보인다.
13. 궁예봉 정상 아래는 깍아지른 절벽이다. 절벽 위에 버티고 서있는 노송의 자태가 멋지다.
14. 궁예봉 아래의 이 독립봉을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15. 독립봉을 내려오면 870봉 사이의 안부에 돌탑이 있다.
16. 궁예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870봉에서의 조망 또한 훌륭하다.
17. 산안고개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길이다. 여기에서 명성산 정상은 4백 미터 거리이다.
18. 산안폭포 아래에 있는 개구리 바위. 채석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 애마가 기다리고 있는 산안고개에 도착해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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