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외설악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등반 - 2012년 10월 13일

빌레이 2012. 10. 14. 17:51

금요일 밤 열 시에 정신이네 집에서 중학교 동창생 다섯 명이 모였다. 설악산 등반을 가기 위함이다. 정신, 은경, 해식, 옥선, 주성, 이렇게 다섯이 뭉쳤다. 옥선이는 암벽등반 초보자이다. 용배가 합류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어 같이 하지 못했다. 그 자리를 옥선이가 대신한 것이다. 초보자가 동행할 등반이기에 비교적 쉬운 난이도이면서 가을 설악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계획했었다. 어느 정도 등반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자신감을 더하고 싶다는 생각에 친구들에게 불쑥 선등을 맡아 보겠다고 공언한 상태이기도 하다.

 

설악동에 위치한 콘도에 여장을 푼 것은 새로 한 시를 넘긴 시각이다. 식당을 경영하는 옥선이가 준비해온 옻오리백숙을 안주삼아 그간 쌓인 회포를 푼다. 감기가 걸려있는 내 몸에 옻나무를 넣은 시원한 국물이 들어가니 힘이 나는 것 같다. 두 시 쯤에 잠자리에 든다. 뜨뜻한 온돌방에 등을 기대고 자니 찜질방에 온 것 같다. 몸에서 땀이 나지만 침대방에선 느낄 수 없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감기 치료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섯 시에 기상한다. 콘도 창문을 통해 감상한 일출은 모두의 기분을 좋게 해준다. 숙소를 나서서 설악동으로 향한다. 목우재터널을 통과하지 못하고 차는 정체된다. 단풍철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정체된 차들을 피해 모텔촌 근처에 주차하고 산행에 나선다.

 

노적봉으로 향하는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릿지 초입에 이르자 이미 한 팀이 등반 준비를 하고 있다. 열 명이 넘는 것 같다. 인사를 나누면서 물어보니 그 앞에도 남자 두 명과 여자 여섯 명으로 구성된 한 팀이 더 있다고 한다. 등반 시에도 정체 현상을 빚을 건 뻔한 일이다. 차분히 마음 먹고 천천히 즐기기로 한다. 우리도 장비를 착용하고 등반 준비를 마친다. 내가 선등을 맡고, 은경, 옥선, 해식, 정신이 순으로 등반하기로 한다. 초보자인 옥선이를 안전하고 즐겁게 가이드하기 위해서 은경이와 해식이가 앞뒤로 포진한 것이다. 정신이는 라스트를 맡으면서 사진 촬영을 맡는다. 설악의 단풍과 친구들의 등반 모습을 담으려는 열정에 무거운 망원렌즈까지 장착했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릿지는 그 이름만큼이나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노적봉 정상으로 향하는 릿지길 우측엔 권금성과 죽순봉의 깍아지른 절벽이 멋지고, 좌측으론 동해로 흘러가는 계곡의 아름다운 자취와 시원한 속초 앞바다가 아름답다. 등반하다 뒤를 돌아보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앞선 팀 때문에 등반이 지체된다고 해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단풍으로 물든 설악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기다리는 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옥선이도 난이도 높지 않은 중반 피치까지는 즐겁게 등반하는 것 같다.

 

디에드르 형태의 짧은 오버행 구간이 있는 일곱 번째 마디부터는 앞선 두 팀의 정체가 심하다. 앞선 팀들은 등반로를 잘 못 선택한 까닭에 지체가 가중되어 우리는 중간에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첫 번째 팀에서 떨어뜨린 낙석 때문에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팀이 등반할 때는 특별히 더 조심해야만 한다. 볼트가 박혀 있는 루트를 제대로 찾아서 등반한다면 그만큼 낙석의 위험도 줄어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뒤에 올라온 다른 한 팀은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채 기다리지 않고 좌측의 다른 루트를 찾아 올라간다. 이 걸 보고 있자니 우리 나라의 안전한 등반 문화에 대한 인식과 실천 의지가 아직은 멀었다는 느낌이 든다.

 

고도감이 더해지는 구간에서 긴장할 옥선이를 생각하여 오버행 크랙에 캠을 박고 레더를 설치하니 선등하는 나도 편하고 좋다. 빌레이 보는 은경이가 루트를 잘 안내해주니 든든하여 등반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 마지막 피치는 빌레이 보는 사람이 등반자를 볼 수 없는 구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중간에서 마디를 끊는다. 본격적으로 암벽등반의 맛을 느끼는 구간이지만 상대적으로 옥선이에게는 힘든 구간이기에 피치를 가능한한 짧게 하려는 생각에서다. 등반 막바지의 오버행 구간은 선등자인 나의 안전을 위해 은경이에게 바로 밑으로 오게 하여 빌레이 보도록 부탁한다. 아무래도 멀리서 보는 확보에서는 혹시나 있을 추락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등으로 등반을 완료하고 은경이는 오버행 밑에서 대기한 후 옥선이를 먼저 올린다. 은경이가 아래에서 옥선이를 잘 코치해주니 간접빌레이 하는 나도 맘이 편하다. 옥선이는 생각보다 쉽게 크럭스를 돌파한다. 긴장이 많이 된 탓인지 얼굴 빛이 좋지 않다. 뒤이어 올라온 은경이에게 옥선이를 안정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은경이가 옥선이에게 앞에 보이는 바다가 어딘지 물었을 때, 옥선이는 "인천 앞바다"라고 대답했다고 하여 한참을 웃었다. 해식이와 정신이까지 안전하게 올라와 노적봉 정상으로 향한다. 정체로 시간이 꽤 지연되었지만 호흡이 척척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하니 어느 때보다 즐거운 등반이 이루어진 것 같다.

 

노적봉 정상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기념사진을 남긴 뒤 하산길에 접어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토왕골의 장쾌한 풍광은 항상 보는 이로 하여금 말문을 닫게 한다. 클라이밍 다운으로 하산하는 구간에서의 안전을 위하여 경사가 심한 구간에서는 옥선이를 보조자일로 확보한다. 은경이가 세심하게 리드하며 옥선이를 안내하는 모습이 믿음직해 보인다. 삼십 미터의 자일 하강을 끝으로 등반은 종료된다. 모두들 안전하게 마쳤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난다. 잔돌이 많아 미끄러운 골짜기로 걸어 내려오는 길은 등반만큼이나 힘겹다. 지체된 등반으로 날이 어두워져 랜턴을 켜야했다. 정신이와 은경이에게만 랜턴이 있다. 나는 큰 배낭에서 등반용 배낭을 꾸리는 과정에서 랜턴 챙기는 걸 잊어버렸다. 두 개의 랜턴으로 서로 의지하며 다섯 친구가 어두운 산속을 천천히 헤쳐나오는 것도 돌이켜보니 뜻깊은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 앞으로는 반드시 랜턴을 항상 소지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설악에서의 등반은 항상 즐겁다. 미시령 근처에서 울산암을 바라보면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한계령으로 방향을 잡아도 장수대 부근이 가까워지면 시원해진 공기와 함께 가슴이 뛴다. 설악은 내게 그런 곳이다. 같이 등반하는 친구들이 느끼는 설악에 대한 인상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뜻깊은 설악에서 발목 수술 이후 처음으로 선등을 섰다. 그동안 꾸준히 준비해서 암벽등반을 다시 시작했고, 부상의 트라우마와 바위의 두려움을 극복한 후 최근엔 등반을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등반에 대한 자신감을 배양하기 위해 선등을 맡아보겠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선등하는 동안 긴장감보다는 침착함 속에서 루트를 찾고 자신있게 손발을 사용하여 오를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의 뒤에는 항상 나를 믿고 배려해준 친구들이 있다. 하나의 자일로 묶여 생명을 나눈다는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등반에서 우리들 자일파티 사이에 흐르는 사랑은 절친의 우정을 뛰어 넘고도 남을 그 무엇이 있다.

 

1. 외설악의 단풍과 함께 한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등반은 시종일관 눈이 즐겁다.

 

2. 릿지길 우측엔 죽순봉과 권금성으로 향하는 절벽과 저 멀리 울산바위의 풍채를 만끽할 수 있다.

 

3. 릿지길 좌측 뒤로는 달마봉이 선명하고 고도를 높이면 속초 앞바다가 잘 보인다.

 

4. 릿지길 초반부 피치는 별로 어렵지 않으나 고도감은 상당하다.

 

5. 짧은 슬랩 구간에서 등반을 이어가는 친구들.

 

6. 릿지길 뒤에서 망원렌즈로 우리를 담겠다고 기다리는 정신이가 보인다.

 

7. 초보자인 옥선이를 받쳐주는 해식이의 모습이 보기 좋다.

 

8. 피너클 지대를 통과한 후 안부에서 올려다본 노적봉.

 

9. 첫 번째 오버행 구간에서 앞선 두 팀이 정체되어 있다. 두 팀 모두 볼트가 있는 코스에서 벗어나 있다.

 

10. 정체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사진찍기 놀이 중.

 

11. 라스트 피치 오버행 구간을 넘어서서 내려다본 모습.

 

12. 등반하는 정신이와 해식이 아래로 릿지길 전경이 펼쳐진다.

 

13. 노적봉 정상에서 바라본 토왕성폭포. 물은 말랐지만 토왕골의 절벽미는 여전히 황홀하다.

 

14. 하산길에 바라본 속초 앞바다. 동해로 뻗어가는 설악산 계곡의 궤적이 뚜렷하다.

 

15. 환상적인 등반을 같이 한 소중한 자일파티. 우리는 모두 나주 세지중학교 동창생.

 

16. 노적봉 정상에서 나도 끼어 기념사진 한 컷을 남긴다.

 

17. 무거운 망원렌즈를 장착하여 촬영에 열중한 친구 정신이의 모습.

                  

18. 하산 도중 클라이밍 다운 구간에서 정신이가 망원렌즈로 찍은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