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설악산이 그런 곳이다. 계절이 바뀌면 생각나고 한 번은 다녀와야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곳. 갈 때마다 가슴 설레이고 그 품에 안겨 있는 동안 아름답고 아찔한 풍경에 경외심을 느끼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지는 곳. 설악은 나에게 항상 특별한 곳이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어떤 형태로든 매년 몇 차례씩은 꼭 설악산에 다녀오곤 했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난 설악에 가지 못했다. 발목 골절상으로 불편해진 다리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설악에 다녀오지 못한 작년 한 해 동안 나의 심신은 무척이나 힘들고 피곤했었다.
봄철 건조기 산불예방 기간 동안 통제되었던 설악산 등반로가 열리는 첫 날, 토왕골의 경원대길 등반에 나선다. 새벽 6시 팔당역에서 정신, 은경, 해식, 그리고 내가 만나서 정신이의 차를 타고 설악산으로 향한다. 나는 우리 네 사람이 등반할 때가 가장 즐겁고 편하다. 차가 미시령터널을 빠져나온 시각은 아침 8시 경이다. 동해로 떠오른 해를 받아 빛나고 있는 울산바위를 보니 감회가 새로워진다. 학사평에 있는 순두부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비룡폭포로 향한다. 비로소 설악의 맑은 공기가 폐부에 깊숙히 박히는 듯하다.
비룡폭포를 앞에 두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 위에서 바라보는 토왕골은 황홀하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듯한 토왕성폭포가 정면에서 병풍처럼 버티고 있고 우측의 노적봉과 좌측의 선녀봉을 필두로 도열해 있는 바위 군상들은 신선들의 세상이 이럴 것이란 상상을 자연스럽게 해준다. 수직으로 뻗어 오른 침봉들 사이로 깊게 패인 토왕골 계곡을 거슬러 올라 선녀봉 좌측의 경원대길 초입에 이른다. 토왕골 합수지점에서 우측으로 얼마 가지 않아 나타나는 초입엔 아직까지 커다란 잔설 덩어리가 남아있다.
가파른 경사면에 피어난 솜다리, 돌단풍, 이름 모를 들꽃과 마주하며 힘겹게 오른 후 나타난 경원대길 등반시작점에서 장비를 착용한다. 믿음직한 정신이가 선등이고 해식이가 선등자 빌레이와 후등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은경이는 해식이의 빌레이를 도와주고, 나는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진 촬영을 주로 담당한다. 비교적 쉬운 1 피치와 2 피치를 한 번에 끊은 정신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등반에 대한 자신감과 내공이 성숙되어 간다는 느낌이다. 정신이가 선등하는 동안 해식이가 빌레이, 은경이는 자일 유통, 나는 촬영과 등반 훈수 두는 역할을 맡으니 등반하는 동안 노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집중력도 좋아져 안전성과 등반에 대한 만족감이 배가된다.
네 번째 피치부터는 갑자기 난이도가 높아진다. 홀드와 스탠스는 양호한 편이지만 직벽에 가까운 경사각과 30 미터가 꽉차는 피치 길이 때문에 4 피치는 힘겹다. 피치 중간의 직벽 구간 바위틈에 소담스레 피어 있던 솜다리 두 송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서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그럴 여유와 배짱이 아직 내게는 없다. 5 피치는 4 피치보다 좀 더 어렵게 다가온다. 크랙과 오버행이 나타나는 구간 특성 때문에 등반 실력이 좋은 이들에겐 즐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겐 약간의 공포감도 느껴질만큼 어려운 구간이다. 정신이의 간접빌레이를 믿고 겨우 겨우 오르면서 찾아드는 또 다른 생각은 이 어려운 구간을 거침 없이 선등한 정신이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크럭스 구간을 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5 피치 끝 지점에서 바라본 풍경은 다시금 토왕골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맞은 편 노적봉 4인의 우정길을 오르던 팀과 우측 선녀봉의 솜다리길을 오르던 등반팀이 개미처럼 보인다. 수직고도를 조금만 높여도 풍경이 달라지는 것은 그만큼 침봉들의 경사도가 높다는 것의 방증일 것이다. 토왕성폭포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은 이제 헬기 타고 하늘에서 내려보는 것 같은 시각으로 굽어볼 수 있다. 설악동 쪽의 달마봉 너머로는 속초 시가지와 동해바다도 시원하게 잘 보인다. 우리 네 사람 모두 자일에 의존하지 않고 오를 정도로 쉬운 구간인 6 피치를 끝내니 1봉 정상이다.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간식을 먹는다. 암벽화와 장비를 벗고 맨발로 정상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설악의 아름다움에 취해본다. 2봉을 거쳐 3봉으로 오르는 길이 선명하게 보이지만 우리 넷은 1봉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아찔한 고도감과 내게는 아직 높게 느껴지는 등반난이도 때문에 힘들었지만 환상적인 등반 호흡을 발휘한 친구들 덕에 매우 만족감 높은 등반을 즐겼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1봉 좌측에 내려서서 전나무에 확보하고 30 미터 자일 하강하니 확보지점이 나타난다. 이 곳에서 다시 30 미터 자일 하강 후 낙석지대를 걸어 조심 조심 내려오니 골짜기에 이른다. 계곡물에 탁족하며 장비를 정리하니 안전한 등반에 대한 감사함이 느껴진다.
토왕골을 내려오며 올려다본 선녀봉과 그 앞의 경원대길 침봉들이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등지고 우뚝 서있다. 뒤돌아보는 우리들 네 친구의 얼굴에 새로운 감회가 서려 있는 듯하다. 육담폭포 아래의 미리내산장에서 동동주와 해물파전으로 뒷풀이를 한다. 산장 주인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이 정겹다. 산사람들이 좋다며 등반 경험담과 함께 특별히 내놓으신 술 맛이 일품이다. 자연산 상황버섯으로 담근 술이다. 그 기막힌 맛 때문에 기분은 한층 고조된다. 돌아오는 길 내내 취흥에 겨워 말이 많아진다. 등반 할 때마다 친구들과의 우정은 조금씩 깊어간다. 설악에서 친구들과 만족스런 등반을 즐겼다는 것이 내 삶에 큰 활력소가 될 것은 자명하다. 마음은 설악의 품을 닮아 조금 더 넓어지고, 내면의 사랑은 깊은 토왕골을 닮아 좀 더 깊어질 것이다.
1. 후등으로 경원대길을 오르고 있는 친구 해식이의 아래로 토왕골이 아스라하다..
2. 비룡폭포에서 등반 전의 기념촬영... 남친들 셋은 출발 전에 모자를 서로 바꿔썼다... 내 모자는 해식, 해식이 거는 정신, 정신이 거는 내가..
3. 토왕골로 진입하는 친구들... 신록의 푸르름 너머로 토왕성폭포와 선녀봉이 선명하다..
4. 경원대길 접근로 초입... 5월인데도 잔설 덩어리가 남아있다..
5. 등반시작점에서 출발 준비로 바쁜 친구들..
6. 4 피치 출발지점...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친구들 덕택에 집중력 높고 안전한 등반이 가능하다..
7. 4 피치 크랙 구간을 선등 중인 친구 정신... 손재밍하고 크랙 좌측의 스탠스를 이용하면...
8. 4 피치 말미의 오버행 크럭스 부분에서 숨고르기 중인 정신..
9. 맞은편 노적봉엔 4인의 우정길을 오르는 팀이 개미처럼 보인다..
10. 5 피치를 오르고 있는 은경이를 담아보려는데... 높은 경사각 때문에 잘 안 보인다..
11. 5 피치 확보지점... 선녀봉의 옆모습과 토왕폭이 잘 보이는 곳..
12. 다쳤던 오른 발 아래로 펼쳐진 토왕골... 이제는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13. 선녀봉의 솜다리길을 등반하던 팀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14. 5 피치에서 후등자인 해식이를 간접빌레이 중인 은경..
15. 5 피치 전망 좋은 곳에서 기념 사진 한 컷... 토왕폭포 물을 손등으로 받아보고..ㅎㅎ.
16. 6 피치를 오르고 있는 친구들..
17. 경원대길 1봉 정상에 올라 선녀봉 쪽을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
18. 경원대길 1봉 정상에서 바라본 2봉과 3봉이 좌측으로 이어진다..
19. 1봉과 2봉 사이에서는 티롤리안브리지가 가능하다고..
20.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토왕골에서 뒤돌아본 경원대길..
'암빙벽등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수봉 고독길 등반 - 2012년 7월 28일 (0) | 2012.07.29 |
---|---|
도봉산 낭만길 등반 - 2012년 5월 19일 (0) | 2012.05.20 |
북한산 꿈길 등반 - 2012년 4월 28일 (0) | 2012.04.29 |
대둔산 구조대길 등반 - 2011년 3월 19일 (0) | 2011.03.20 |
북한산 원효봉-염초봉 리지 및 백운대 대슬랩 등반 - 2011년 3월 12일 (0) | 2011.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