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강촌 유선대 암장 - 2021년 9월 25일(토)

빌레이 2021. 9. 26. 03:28

강촌의 유선대 암장을 2주만에 다시 찾았다. '코난발가락(5.11a)' 루트가 내 눈 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시동(5.11b)'을 완등했던 짜릿한 순간의 기분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추석연휴 동안 망가진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오랜만의 명절 귀성길인지라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수칙을 준수한 가운데 소규모로 가졌던 가족 친지들과의 반가운 만남의 자리에서 과식과 과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귀성과 귀경길의 교통체증은 여전하여 장시간의 운전으로 인한 피곤함은 누적되었다. 직장으로 복귀한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의 업무량 또한 과중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일레븐대 루트의 완등을 기대한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렇지만 해보지도 않고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는 평소의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계획한 대로 유선대 암장에서의 등반을 강행하기로 했다. 

 

다소 쌀쌀해진 아침 공기 속에 '그리움(5.10c)' 루트에서 몸풀이 등반을 했다. 예상대로 몸상태는 잔뜩 흐린 하늘만큼이나 찌뿌득하고 무거웠다. '그리움'길을 두 차례 오르고 나니 몸은 어느 정도 예열된 듯했다. 곧바로 오늘의 목표인 '코난발가락'에 붙기로 했다. 출발점에서 올려다 본 '코난발가락'은 루트를 확실히 가늠할 수 없었다. 반질반질한 페이스에 브이(V)자 모양으로 설치된 톱앵커는 확실하게 보이는데 등반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아래에서는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붙어 본 '코난발가락'인지라 온사이트(onsight) 완등이라는 꿈이 뇌리를 잠깐 스쳐 지나갔으나, 첫 번째 크럭스 구간에서 그 꿈은 새까맣게 잊혀졌다. 어떻게든 톱앵커에 로프를 설치하고 레드포인트(red point) 완등을 위해서 톱로핑 상태로 연습하자는 현실적인 생각만이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쉽지 않았다. 중간 이후부터는 거의 원 볼트, 원 테이크 형태로 겨우 톱앵커에 로프를 클립할 수 있었다.

 

톱로핑 상태로 다시 붙어보니 '코난발가락' 루트의 궤적이 어느 정도 확실해졌다. 등반선이 디에드르 형태의 크랙 아래로 펼쳐진 페이스 부분을 따라서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거의 모든 볼트가 등반선 우측의 칸테 지점에 있어서 추락 시에 펜듈럼을 칠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심리적인 위압감과 고도감이 상당했다. 전체적으로 세 군데의 크럭스가 도사리고 있는 '코난발가락' 루트의 홀드와 무브는 세 번째 톱로핑 등반에서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네 번째 시도에서 레드포인트 완등을 노렸으나, 첫 번째 크럭스를 돌파하면서 급격히 체력이 고갈되어 두 번째 크럭스를 넘지 못하고 "테이크"를 외치고야 말았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처음엔 등반선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던 '코난발가락'을 몸상태가 좋은 날엔 완등할 수도 있으리란 예감을 받았던 것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유선대 암장에 다시 와야 할 확실한 이유가 하나 생긴 셈이다.

 

우리팀이 유일한 손님이었던 오늘의 유선대 암장은 간간히 들리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극성스러웠던 산모기들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결실의 계절인 가을은 화려한 단풍과 함께 깊어갈 것이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들의 등반도 아름답게 무르익어 갈 것이란 희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 '그리움(5.10c)'길에서 먼저 몸을 풀었다.
▲ '그리움'길 첫 피치는 지금의 내 수준에서 워밍업 등반에 아주 적절한 루트이다.
▲ 오늘의 목표인 '코난발가락(5.11a)'을 처음으로 오르고 있다. 
▲ 상단부 오버행 천정 아래의 페이스에 V자로 걸려 있는 톱앵커는 확실히 보이는데, 등반선은 확실히 가늠할 수 없었다.  
▲ '코난발가락' 첫 번째 크럭스를 돌파한 직후이다. 세 번째 볼트에 클립하고 우측으로 트래버스 해서 중단부로 진입해야 한다. 
▲ 다섯 번째 볼트에 클립한 후에 스탠스가 아주 좋은 레스트 포인트에서 언더 홀드를 잡고 충분히 쉴 수 있었다.
▲ '코난발가락'의 등반선은 볼트 좌측으로 이어진다. 크랙과 페이스가 혼재되어 있는 루트는 다양한 동작을 요했다. 특히 페이스 구간에서는 왼발 스탠스가 양호하지 않아서 엄지 발가락 끝에 힘을 단단히 줘야 했다.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발가락 힘이 장사였던 코난을 연상하여 루트의 이름을 지었다는 게 이해가 갔다. 밸런스를 요하는 동작도 많고 고도감과 심리적 압박감도 만만치 않은 매우 흥미로운 바윗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가까스로 로프를 설치한 후에 톱로핑으로 연속 동작을 연습하니 등반선과 홀드가 점점 확실해졌다. 
▲ '코난발가락'의 최고 크럭스는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 볼트를 넘어서는 구간이다. 페이스에서 아주 예리한 작은 홀드를 왼손으로 잡고 칸테 아래의 날카로운 작은 홀드를 오른손으로 잡은 상태에서 스태밍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이때 왼발을 확실히 찍는 것이 관건이다.
▲ 톱앵커 직전에서는 우측 크랙을 레이백 자세로 오른 후 또 한번 왼발을 페이스의 미세한 홀드에 찍고 올라서야 했다.
▲ 동작을 얼추 풀어낸 듯하여 네 번째 시도에서 완등을 노리고 출발해 보았다.
▲ 쉽게 돌파하리라 예상했던 첫 번째 크럭스에서 용을 쓰느라 급격히 체력이 소진되었다.
▲ 레스트 포인트에서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렸으나, 두 번째 크럭스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힘이 모자라 여섯 번째 퀵드로를 잡고야 말았다.
▲ 오늘은 아무래도 '코난발가락'을 완등하지 못할 듯하여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201동(5.10b)'에서 정리 운동을 하기로 했다.
▲ '102동' 다음 피치인 '202호(5.10c)'까지 등반하고 싶었으나, 더이상 의욕이 나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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