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재를 넘자마자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화려한 단풍이 반겨주었다. 인수봉 남동면의 '인수B'길 출발점 부근도 곱디 고운 단풍이 아침 햇살을 머금고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 단풍과 화창한 가을 날씨를 즐길 새도 없이 내몸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다. 어프로치를 끝내고 장비를 착용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 허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작년에 집안에서 재채기를 하다가 어이 없이 허리를 삐끗해서 며칠 간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그 후부터 상태가 좋지 않던 것이 오늘 다시 말썽을 부린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잘 참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첫 피치 등반을 해보고 나서 아픈 정도를 파악해보기로 했다. '인수B'길 1피치를 올라가서 테라스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허리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이상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확보점이 있는 테라스에서 쉬고, 기범씨와 은경이만 '아미동'길 두 피치를 등반한 후, 다같이 하강하여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어제는 대섭이가 정강이 통증이 심해져서 오늘 등반에 참석할 수 없다는 문자를 남겼고, 오늘 새벽엔 동혁씨마저 갑작스런 일이 생겨 등반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웬만하면 참고 끝까지 등반을 함께 하고 싶었으나, 허리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하는 수 없이 나만 먼저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상태는 되어서 홀로 산을 내려오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기범씨와 은경이에겐 미안한 마음이었으나,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반할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자칫 무리했더라면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 산을 내려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경이와 통화한 바에 의하면, 내가 하산하던 시간에 인수봉 오아시스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기범씨가 '생공사'길 등반 중에 현장을 목격하고, 사고 처리를 도우러 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안타까운 사고로 숨진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여러 모로 일진이 좋지 않은 하루였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 앞에 일어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냉철하면서도 차분하게 대처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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