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엔 물빛 그리움이 있다. 물빛은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다채로운 산의 모습을 맑은 물속에 온전히 담아내는 빛깔이다. 그 빛깔의 잔영이 가슴 밑바닥에 남아있기 때문인지 자주 다녀와도 실증나지 않고 다시 가고싶은 곳이 설악산이다. 밤잠을 설치면서 새벽길을 달려가는 고생을 자처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 바로 설악인 것이다. 병을 낫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명약을 구하러 떠나는 사람들처럼 나도 설악산을 찾는다. 설악의 아름다운 바윗길과 청아한 대기 속에는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쌓일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신비한 치유의 물질이 분명히 깃들어 있을 것이다.
토요일 새벽 4시 무렵 서울을 탈출했다. 내차에 기범씨와 은경이가 동승한 다음, 동혁씨를 픽업하러 갔는데 약속 장소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도 꺼져 있는 상태라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이 경과한 후에 일단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동혁씨는 지난 밤의 과음으로 휴대폰을 지인의 집에 놓고 온 모양으로 새벽 시간에 기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별일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섭이는 강남에서 홀로 자차로 출발하여 설악동의 숙소 인근 식당에서 합류했다. 새벽 시간이라서 교통정체가 없으니 서울에서 설악동까지 2시간 남짓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유있게 아침식사를 하고 소토왕골 암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가 채 넘지 않았다.
먼저 소토왕골 암장에 온 기념으로 멀티피치 등반에 나섰다. 기범씨의 선등으로 은경, 대섭 순서로 오르고 나는 라스트를 맡았다. '물'길 두 피치를 오른 후에 이어지는 '낙화유수' 후반 세 피치를 등반하여 종착점인 능선에 다다랐다.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루트가 지나는 능선이어서 익숙한 곳이다. 청명한 하늘 아래 존재감을 과시하는 울산바위와 달마봉을 포함한 외설악의 시원스런 풍광을 대하니 비로소 설악의 품에 안겼다는 실감이 절로 났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한 후에 소토왕골 암장으로 귀환하여 세 개의 루트를 더 등반하는 것으로 올해의 첫 설악산 등반을 즐겁게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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