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첫 주례를 본 소감

빌레이 2014. 6. 15. 20:36

어제 처음으로 주례를 섰다. 내가 석사학위 지도교수인 제자의 결혼식 주례였다. 벌써 사오년 전에 다른 제자로부터 결혼식 주례를 서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주례로 나서는 것이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대신 다른 원로 교수님들 중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번 주례도 처음엔 극구 사양했었다. 그런데 제자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주례를 서주지 않으면 좀 늦은 나이의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해온 것이다. 나를 주례로 세워야할 어떤 내기라도 한 것처럼 매달리는 그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겨울에 신랑 될 제자가 신부 될 사람을 데리고 왔었다. 함께 만찬을 즐기면서 대화를 나눠본 느낌이 좋았다.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어제 비로소 결혼식 날이 찾아왔다.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일주일 전부터 주례사를 어떻게 할까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결혼식 주례를 아무 탈 없이 감당해낼 수 있을지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남들 다 하는 것 나라고 못하란 법 있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염려보다는 기도를 하고, 걱정할 시간에 실질적인 준비를 하자는 평소의 신념대로 차분히 맘 먹고 주례사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 결혼식에서나 들을 수 있을 듯한 주례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례가 돋보이는 멋진 연설이 아니라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하해주는 마음으로 가득찬 진실된 말을 전하고 싶었다. 간결하면서도 기억에 남을만한 주례사가 되기 위한 조건을 생각해보았다. 전체 길이는 5분을 넘기지 말고, 가능하면 청중들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유머를 한 가지 곁들이면 좋겠다. 이 두 가지 조건만 생각하고 주례사의 원고를 작성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일주일 동안 틈나는 대로 다섯 번 정도의 수정을 거쳐 주례사를 완성했다. 실제로 낭독해보니 4분 30초 정도의 분량이었다. 대략 이 정도면 현장에서는 5분 정도 소요되어 길다는 느낌은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식 당일 예식 두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평소 정장 차림을 잘 하지 않는 관계로 주례에 적당한 옷이 없어서 특별히 장만한 새 정장을 입고 강남의 예식장으로 향했다. 예식장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강남에서도 이름난 장소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곳이다. 먼저 제자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사회를 볼 다른 제자와 결혼식 절차에 대해서 상의했다. 예식장 직원이 순서지를 주면서 대충의 절차를 소개해주니 편리했다. 처음 하는 주례이니 만큼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편안히 기다리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을 듯한데 조금은 긴장한 탓인지 어느새 예식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자의 진행과 순서지에 따라 주례가 담당할 것을 차례대로 하다보니 주례사를 해야할 차례가 되었다.

 

이름난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처럼 멋지게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하는 것이니 만큼 인쇄해온 주례사를 또박또박 읽어나가기로 했다. 두 장으로 된 주례사의 첫 장이 넘어가자 식장 안은 조용해졌다. 사랑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에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한 내용의 글이 청중들에게 들렸는지는 의문이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 왁스가 부른 <결혼>이란 노래의 가사 한 대목을 소개했다. 후렴 구 중에서 "신랑~ 듬직해보이고, 신부~ 너무나 눈부셔, 주례~ 말씀이 너무 길어~" 이 부분을 읽을 때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 이때를 놓지지 않고 "주례, 말씀이 너무 길어.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 저도 '짧게나마 이것으로 주례사를 마치겠습니다'라고 하고 싶지만, 진짜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에게 안도현 시인의 <사랑한다는 것>이란 시 한 수를 선물하는 것으로 주례사를 가름하겠습니다."라 말하고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주례사를 끝냈다.

 

나의 첫 주례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평가는 나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랑 신부가 나의 주례 진행과 주례사를 마음에 들어했는지도 아직은 잘 모른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내가 주례를 봤다는 소식에 궁금해서 일부러 전화까지 주셨다. 어머니 앞에서야 항상 어린애 취급 받는 건 나이 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주례를 섰다는 사실에서 어머니는 내 나이를 조금은 인정하시는 분위기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은 설레이는 것이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 설레임이란 것이 젊은 시절의 긴장감과는 다른 느낌으로 찾아든다. 떨리는 마음보다 기대 섞인 설레임은 나쁘지 않다. 어찌 되었든 나의 첫 주례는 끝나서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첫 주례를 본 신랑 신부가 오래될수록 더욱 보배로운 빛을 발하는 진짜 사랑이 흘러넘치는 결혼 생활을 엮어 나가길 다시 한 번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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