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모래사장을 다섯 시간 가까이 걸어본 것은 처음이다. 숙소가 있는 UCSB의 골레타 비치와 산타바바라 다운타운 앞의 비치는 모래사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길이가 30 킬로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에 모래사장이 연결되어 있는 곳을 한국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골레타 비치 북쪽으로도 한참 동안 모래사장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 해변에 연결된 모래사장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산타바바라 인근의 태평양과 접한 해변은 그야말로 끝없이 이어진 모래사장의 연속인 것이다.
전날까지 빡빡한 일정으로 짜여진 학회가 끝나고 하루 동안 혼자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UCSB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탄다. 산타바바라 시내로 향하는 버스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미국 출장을 올 때는 매번 렌트카를 이용했었는데 이번에 차 없이 생활해보니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 산타바바라 시내에 내려 세 시간 정도를 걸어서 관광한다. 법원 건물의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생선튀김에 감자튀김을 곁들인 요리로 점심을 먹고 해변을 따라 UCSB의 숙소를 향해 걸어가보기로 마음 먹는다. 출발하기 전 구글 지도를 보았을 때 틀림없이 산타바바라 해변과 골레타 해변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향만 잘 잡으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다.
산타바바라 시내의 스테이트 스트리트를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 철길을 만난다. 암트랙이 다니는 이 철길을 건너서 똑바로 걸어가면 스턴스 와프(wharf)가 나타난다. 나무로 만들어진 부두이다. 이 부두에서 산타바바라 비치를 구경하다가 요트들이 정박해있는 북쪽의 항구 방향으로 진행한다. 자전거 도로와 보도가 잘 되어 있다. 항구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다시 모래사장이 시작된다. 윈드 서핑과 카이트 서핑을 즐기는 이들이 눈에 띤다. 우리 나라의 한산한 해수욕장 같은 모래사장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돌출된 부분이 보여서 우선 그 곳까지는 도로를 따라 나있는 보도 위를 걷는다.
멋진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돌출부는 언덕을 이루고 있고 그 언덕 위에는 드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곳에서 산타바바라 방향의 해변을 내려다보면 조망이 제법 시원하다. 공원에서 바닷가 방향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잔디밭 사이로 나있는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걷다 보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서서 모래사장을 밟아본다. 중간에 걸어가다 아무래도 신발을 벗어야 할 곳이 나타날 것이란 생각에서 처음부터 맨발로 걸어보기로 한다. 신발은 배낭에 걸치고 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다. 간간히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비치 트레킹을 즐긴다.
진행 방향의 오른 쪽은 거의 대부분 절벽이다. 단단한 바위 절벽은 아니고 물살에 쉽사리 무너질듯한 흙으로 이루어진 절벽이다. 화강암 같이 단단한 바위로 구성된 절벽이었다면 암벽등반이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석거리는 흙 절벽은 오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절벽이 이어지던 해안은 간간히 야트막한 언덕으로 변한다. 이러한 곳은 육지 쪽에서 밸리를 이루고 있으며 강물이 흘러들어오는 곳도 있다. 밸리 지역에 인접한 해변은 드넓은 백사장이어서 자연스레 사람들로 붐비는 해수욕장이 된다. 이와 같은 해수욕장을 몇 개나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넓은 해수욕장을 본 것 같다.
맨발로 걷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 단순한 지형이고 평탄한 곳이기 때문에 산을 탈 때와는 달리 숨이 차지는 않는다. 다만 발가락과 고관절 근육들이 육지를 걸을 때보다 더 일찍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지친 발과 다리를 쉬어주기 위해 잠깐 동안의 휴식을 갖어보지만 그늘도 없어서 길게 쉴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심신이 지쳐갈 무렵 익숙한 지형이 수평선 위에 아른 거린다. 골레타 해변을 지나 돌출된 부분에 자리한 UCSB 캠퍼스가 보인 것이다. 캠퍼스 중앙에 있는 시계탑이 우뚝하여 이정표 역할을 해준다.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두어 시간은 더 걸어야 도착할 것 같다.
산을 걸을 때와 달리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사장을 걷노라니 거리 감각이 없어진다. 목적지가 눈에 아른거리기는 하지만 지친 발걸음 때문인지 걸어도 걸어도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다른 선택이 없으니 전진할 수 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문득 앞에서 걸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이상하다. 키 큰 백인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인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이다. 말로만 듣던 누드비치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LA 남쪽의 샌디에고 근처에 누드비치가 있다는 것을 언뜻 들은 바는 있지만 산타바바라 인근에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럽다.
걸어오는 동안 누드비치에 관한 그 어떤 표시도 없었기에 나는 긴팔 옷을 입은 상태에서도 묵묵히 내 갈길을 향해 전진한다. 다행스럽게도 불과 몇 미터 옆으로 지나치는 세 명의 나신들도 전혀 나를 개의치 않고 그들끼리 재잘거리며 걷는다. 조금 더 걷다보니 이번엔 두 남자가 원반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다. 이들도 모두 나체 상태이다. 이쯤 되니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드비치에서는 나체가 예의일텐데 나는 위 아래 모두 긴 옷을 걸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벗고 있는 목욕탕에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어색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누드비치가 끝나는 듯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말로만 듣던 것의 실제 모습을 체험했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으로 축적된다는 생각이 든다.
한숨을 돌린 곳에서 모퉁이를 돌아서니 며칠 전 산책 나왔던 익숙한 골레타 비치가 펼쳐진다. 다리는 뻐근하고 발바닥은 아픈데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골레타 비치 공원의 화장실에서 발을 씻는다. 발바닥이 새까맣다. 아스팔트 찌꺼기 같은 것이 붙은 기름때가 발바닥을 덮고 있다. 대충 씻고 학회 참석자들이 야외 만찬을 즐겼던 잔디밭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새로운 곳에 다녀오면 발견의 기쁨이 있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단조로운 지형의 해변을 다섯 시간 이상 걸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뿌듯함이 자리한다. 그동안 자동차로만 다녔던 미국 출장길에서도 차를 빌리지 않고 하루 동안 뚜벅이로 지낸 시간이 소중했다. 이번 출장길이 미국 사회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속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내게는 결코 지나친 얘기가 아니다.
1. 고운 모래사장을 맨발로 잠시 동안 걷는 기분은 상쾌하다. 하지만 길게 걸으면 상당히 피곤하다.
2. 산타바바라 시내의 스테이트 스트리트를 따라 내려오다가 암트랙이 다니는 철로를 지나면 산타바바라 비치가 펼쳐진다.
3.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곳이 나를 유혹하기는 하지만 비치 트래킹을 마음에 둔 상태라서 패스한다.
4. 모래 언덕이 경계를 이루어 조그만 석호가 만들어진 곳에 새들이 많다.
5. 스턴스 와프는 산타바바라 비치에 있는 나무로 된 부두이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부두이다.
6. 스턴스 와프에서 산타바바라 시내를 돌아본 풍경이다. 다음에 오면 저 뒤의 산에 올라봐야겠다.
7. 산타바바라 항구엔 고급스런 요트들이 많이 정박해있다.
8. 항구를 지나면 또다른 모래사장이 이어진다. 카이트 서핑을 즐기는 것이 보인다.
9. 해안선에서 돌출된 부분은 신발을 벗고 지나야 하기 때문에 그 곳을 넘어서 내려가기로 한다.
10. 언덕 위에서 산타바바라 비치를 돌아다본다.
11. 언덕 위의 공원 길을 따라 걷는다.
12. 공원에서 해변으로 내려서는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13. 여기서부터는 맨발로 걷기 시작한다.
14. 신발은 배낭에 매달고 바지는 무릎까지 걷어올린다.
15. 바닷가로 내려오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만 공공용은 매우 드물고 대부분 개인용이다.
16. 비치를 따라 걷다보면 개들을 자주 만난다. 어떤 개는 약간 무섭다.
17. 절벽은 단단하지 않은 흙으로 구성되어 침식에 약하다. 쓰러진 나무도 침식에 의해 무너진 절벽 때문이다.
18. 쓰러진 나무라도 새에게는 훌륭한 쉼터가 된다.
19. 사람들이 많은 해수욕장이 간간히 나타난다. 오른쪽 절벽이 낮아지는 지형에 넓은 백사장이 위치한다.
20. 골짜기를 흘러온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이러한 곳엔 어김없이 해수욕장이 있다.
21. 절벽 위에 개인용 별장이 보인다. 나름대로 침식에 대비한 토목공사를 한 흔적이 있다.
22.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위를 걷다보면 숨은 가쁘지 않지만 다리 근육이 피곤함을 호소한다.
23. 수평선 너머에 UCSB 캠퍼스의 모습이 보인다. 길을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찾아든다.
24. 해안 절벽은 대부분 사유지인 듯하다. 이러한 곳에 설치된 계단을 넘어서면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ㅎㅎ
25. 어느 정도 목적지가 가까워지니 물새들이 친구처럼느껴진다.
26. 단조로운 절벽 아래에 누드비치가 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27. 알프스 등반 때 생긴 왼발 엄지발가락 부상에도, 발목 골절로 수술했던 오른발로도 장 시간의 도보를 견뎌준 두 다리가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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